호서사림(湖西士林)의 본향충북의 유교문화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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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사림(湖西士林)의 본향충북의 유교문화를 찾아서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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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충북학연구소>
충청좌도와 더불어 호서지방으로 통칭되어 왔던 현재으 우리 충북지역은, 영남학파와 함께 조선후기 정계와 학계를 야분하였던 기호학파의 핵심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왔다.

영남사림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양대축을 이루는 기호사림의 중심은 역시 호서사림이다. 호서사림은 김장생, 김집으로부터 송시열, 권상하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종장들을 배출함으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즉 기호사림은 영남사림과 쌍벽을 이루며 조선의 정치 및 사상계를 양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호서지방은 기호사림의 중요한 기반이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림의 역할과 업적에 관해서는 영남사림이 강조되고 상대적으로 기호사림은 저평가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남학파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 등의 계보로 요약된다면, 기호사림은 (안향)-권보-이제현 이곡-이색-권근으로 이어지는 초기 도통과 이이-김장생-(김집)-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지는 후기 도통으로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흐름에서 보듯 이황과 조선후기 쌍벽을 이루었던 이이는 기호사람의 종장으로서 이때부터 기호사림의 무게중심은 경기지역에서 호서지방으로 옮겨 오게 된다. 하지만 호서사림의 전성기는 우암 송시열 이후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겠다. 송시열이 청주목 화양동에 터를 잡음으로써 청주는 호서사림의 메카로 떠오르게 된다.

우암의 사후 그의 뜻에 따라 만동묘가 건립되고, 그의 위패를 모신 화양서원이 건립되면서 청주는 오서사림의 기반으로 확고한 위치를 굳히게 된다. 송시열의 적전을 이어받은 수암 권상하는 본래 경기도 사람이었으나, 17세기초 청풍 황강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송시열의 사사를 받게 되어 후에 기호사림을 영도하는 종사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충북에는 송시열과 권상하와 관련된 유적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우암의 체취가 남아 있는 괴산군 화양동 자락의 화양서원지와 만동묘, 수암의 학풍이 살아 숨쉬고 있는 제천시 한수면의 황강영당과 수암고택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또한 음서의 권근3대묘는 기호학파의 초기도통을 후기 율곡에 전해주는 한 권근과 관련된 대표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우암의 경우에는 그의 족적이 미치는 곳마다 문풍(文風)이 일어 도내에도 그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청주, 청원은 물론이고 옥천과 영동 그리고 인근의 대전 대덕에 그와 관련된 유적이 남아 전한다.

한편 16세기 충청도 보은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처사형 사림의 입지를 지킨 대표적인 인물인 대곡 성운도 빼놓을 수 없다. 을사사화로 형 성우가 죽은후, 처의 고향인 보은 종곡리로 내려와 은거한 성운이 당대의 또 다른 처사였던 조식, 성제원, 서경덕과 교분을 나누었던 자취가 지금까지 남아 전하고 있다. 이처럼 풍부한 유교적 자산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우리 지역의 유교문화에 대한 소개서가 부족하던 차에, 기행서 형태를 빈 충북의 유교문화에 관한 책자가 발간되어 여간 기쁘지 않다.

이번에 책이 발간되기까지 자료협조를 아끼지 않으신 도내 각 향교와 서원,도청 및 각 시군의 해당실과는 물론이고, 바쁘신 중에도 자료협조를 아끼지 않으신 향토사학자 여러분들과 문중에 전해 내려오는 숨겨진 이야기를 자상하게 들려주신 문중의 어르신들께도 이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이번에 발간된 충북의 유교문화를 찾아서가 우리고장사람들은 물론이고 타 지역 사람들에게도 우리 충북 유교문화의 독창성과 위상을 알림으로써 유교문화의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02년 12월충청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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