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한이 깃든 덕주산성
상태바
망국의 한이 깃든 덕주산성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4.0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부권<2> - 제천시<1>

천년사직의 신라! 나라를 잃은 설움이 처처에 배어있는 송계의 덕주산성을 찾아가는 길은 휴일을 맞은 탓으로 차량행렬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달천강을 가로질러 4차선 도로를 천리마처럼 달리던 자동차들이 수안보 삼거리 신호등에서 방향을 왼쪽으로 꺾어 단양방면 36번 국도로 들어서자 노폭이 줄어들며 거북이 걸음을 하기 시작했다. 호반 길을 구비구비 돌고돌아 월악대교를 건너 덕주산성으로 들어가는 송계 입구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해가 머리 위로 곧추 떠있었다.

괜스레 마음만 조급해졌다. 월악나루를 지나고,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수암 권상하 선생의 한수재가 오른쪽으로 보이며 평정을 찾기 시작했다. 서두름 없이 유유자적하던 옛 성인의 모습이 떠올라 안달하는 내 모양새가 부끄러워서 였음이리라.

   
덕주산성은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 1-1번지 덕주골에 있으며 삼국시대에 축성된 성으로 1983년 3월 30일 지방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었다. 덕주산성은 내성·중성·하성을 비롯하여 송계리의 남북 입구에 있는 두 개의 관문을 말하는데, 일반적인 성곽과는 달리 계곡을 성으로 쌓고 그 외는 험준한 산 능선과 암벽을 이용하여 축조된 성이라는 점이다. 이 가운데 내성은 덕주골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곽으로 마애불과 절터가 남아있는 상덕주사를 중심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4㎞에 이른다.

중성은 덕주골의 하덕주사와 내성 및 동쪽의 계곡까지 에워싼 것으로 동문을 주통로로 하고 있다. 이 중성은 남북의 적을 방어하는 목적보다도 내성을 방어하거나 통로로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하성은 덕주골 입구에서 약 500m 쯤 되는 계곡의 북안 기슭에 위치한 것으로 중성으로 진입하는 적을 일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약 120m로 다른 성에 비해 규모가 작으며 폭 또한 좁게 쌓았는데 아랫부분을 대형 활석으로 쌓은 옛 축조방식과 차이가 있어 고려말이나 조선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 상덕주사는 6·25 때 불타 버렸고, 현재의 하덕주사는 1970년에 중건하여 규모를 늘려 가고 있다.
금의 덕주산성은 우선 맨 꼭대기 부분의 내성인 상덕주산성과 덕주골에 있는 월악동문 안의 외성인 하덕주산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북문·남문·동문 사이에는 외성이 둘러쳐져 있다. 외성인 하덕주산성은 덕주골 충북대학교 연습림 관리사무소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350m 거리에 있는데 월악동문과 중간지점에 있다.

덕주사로 오르는 현재의 길에서 북쪽으로 5m 정도 올라가면 성벽을 잘라서 만든 문이 있는데, 거기서부터 산능선을 따라 정상까지 석축이 연결되어 있다. 자연석재를 사용한 이 성벽은 그 축성법이 상덕주산성과 같아서 덕주산성의 외성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현재 성벽은 매우 심하게 무너져내려 그 자취를 겨우 알아볼 정도였으며, 높이 1∼2m, 폭 2m 정도로 남아있는데 그 벽면이 거의 수직이 되도록 쌓았다. 자연암반을 이용한 곳은 성의 기초부분이 밀려나지 않도록 쐐기를 박아가며 쌓았다.

문자리는 아주 큰돌로 쌓았으나 심하게 무너져서 겨우 흔적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산성내에 있던 원래의 덕주사는 대찰로 상덕주사 자리에 있었으나 6·25 전쟁 중 월악산에 은거해 있는 빨치산들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국군들에 의해 모두 태워져버려 폐허가 되었다.

지금의 덕주사는 하덕주사로 1970년에 중건되어 점차 규모를 늘려가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절 마당에 남근석이 모여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이는 월악산이 음기가 강한 산으로 풍만한 여인의 젖가슴을 드러낸 모습으로 누워있는데 이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리라.내성인 상성(상덕주산성)은 하덕주산성에서 상덕주사로 오르다보면 석축으로 된 성곽이 좌·우로 뻗어 있는데, 지금의 통로가 원래의 문자리이다. 상덕주사가 있는 계곡을 좌우로 가로질러 산 위로 올라가면 북으로는 천연의 암벽으로 연결되며 둘레가 아주 크다. 이 문자리의 좌우는 자연석재의 면을 살려서 쌓았으며 좌측(서쪽)의 계곡쪽에는 요(凹)형으로 쌓았는데, 높이 4.5∼5m, 폭 11∼12.3m에 이른다.

   
▲ 덕주산성은 계곡을 성으로 쌓고 그 외는 험준한 산 능선과 암벽을 이용해 축조된 점이 특징이다
경사가 심한 곳의 성벽은 유실을 막기 위해 위에서부터 계단식으로 높이 1.5∼2m의 단을 두면서 내려가고 있다. 이 내성 역시 많이 무너졌으나 통로문과 계곡을 잇는 요(凹)형의 부분 수문자리는 잘 남아있다. 상덕주사에는 보물 제406호인 마애여래상이 있다. 높이가 13m나 되는 거대한 석벽에 조성된 마애여래상은 신라의 덕주공주가 조성했다고 전하며, 오빠인 마의태자가 세운 미륵대원의 석불과 마주보게 서 있다고 한다. 관문인 북문 안쪽 송계초등학교 교내에는 월악궁지가 있었다고 전한다.

월악궁은 명성황후의 별궁으로 고종 29년(1892)에서 1894년까지 3년간에 걸쳐 충청·전라·경상·강원도 등에서 걷어들인 3년간의 대동세를 재원으로, 전국에서 뛰어난 석수·목공·기와공 등을 동원하여 짓게 했다. 별궁의 성은 높이가 20척, 두께가 25척의 체성과 사대문·암문·수구문·궁궐을 갖춘 궁이었지만 1895년 고종 32년 8월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사용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 버렸다.

당시 건물들은 1920년 10월 한수보통학교의 교사를 건축할 때에 궁궐을 뜯어다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1958년 지금 송계초등학교의 부지를 닦으며 땅속으로 묻어버리거나 훼손되어 그 웅장한 모습을 가늠키 어렵지만 지금도 운동장 서쪽에 돌축대와 주춧돌이 남아있으며 교실로 들어가는 출입구 양옆의 화단에는 괴석을 시멘트로 붙여 세워놓은 주춧돌을 볼 수 있다. 덕주산성은 독특한 구조로 겹겹이 쌓은 보기드문 복합성이다.

   
▲ 덕주산성 남문
험준한 월악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덕주골의 동문이 마지막 보루가 되도록 만들어진 전략적인 가치가 높은 성이다. 문경 쪽에서 넘어온 적은 남문에서 막고, 한강과 충주 쪽에서 침입해오는 적은 북문에서 막을 수가 있다. 만일의 경우 두 문이 모두 무너지면 동문에서 마지막으로 전투를 벌일 수 있는데 이곳은 산세가 험하고 성곽의 길이가 짧아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동문마저 무너지면 내성에서 농성을 하거나, 월악산 능선을 타고 올라가 사방으로 탈출할 수 있는 지형을 지니고 있는 특이한 구조의 성이다. 이런 뛰어난 장점을 지니고 있는 성이기에 고려시대의 몽고난리 때나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수많은 인명을 구해준 상서롭고 고마운 성이기도 하다. 산성내에는 세 개의 성문이 있는데 동문·남문·북문이다.

   
▲ 동문.
동문은 상덕주사와 하덕주사로 통하는 관문으로 내외 홍예문에 태극문양과 장군 모양의 무사석이 갖추어져 있다. 남문은 미륵리에서 송계 계곡으로 들어오는 입구인 달천의 상류에 있는 것으로 하천과 도로의 서쪽으로 높은 대지 위에 만들어져 있다. 남북으로 트인 평지 위에 홍예식 성문을 만들고 성벽은 작은 활석으로 정연하게 쌓아 조선시대 성곽 축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북문은 송계 초입의 새터 마을에 있는 것으로 문의 양식은 남문이나 동문처럼 홍예를 이루며 홍예 마루돌에 태극모양이 조각되어 있어 주목되고 있으며, 내외 5겹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덕주산성이 있는 월악산국립공원 안에는 수많은 문화유적들이 남아있는 역사의 보물창고다. 아울러 송계팔경 등 빼어난 산수와 함께 어우러져 청소년들의 수련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송계팔경은 자연대·망폭대·와룡대·학소대·수경대·월광폭포·팔랑소·월악영봉 등을 말한다. 월악산 영봉으로 가는 등산로에는 덕주사·마애불·덕주산성의 동문이 있는데 덕주사와 마애불에는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에 관한 전설이 구전되어지고 있다.

신라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마의태자가 월악산에 이르러 지친 발걸음을 잠시 멈추어 대원사지에 석굴사원을 세우고 그의 누이 덕주공주는 덕주사를 짓고 자신의 모습을 닳은 자화상을 높은 산밑에 마애불로 새겨놓았다는 것이다. 전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남향한 암벽의 마애불은 태자가 창건한 북향의 미륵불상을 마주보고 있다.

   
▲ 덕주사 마애여래상.
미래불인 미륵불이 서방정토를 향하지 않고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마도 미륵불의 시선이 닿는 중원벌이야 말로 바로 중심이 되는 극락정토라고 여겼던 그 시대의 꿈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후 마의태자가 월악산을 떠나며 “월악산이 물에 비치고 항구골에 배가 닿을 때 신라 망국의 한이 풀릴 것이다”라고.

이제 충주댐의 건설로 영봉 허리까지 물이 차올라 사시사철 영봉이 강물에 떠 있고, 호수 위로는 수백 명이나 태울 수 있는 유람선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으니 마의태자의 예언처럼 망국의 한은 풀렸는지…… 지릅재를 넘어 수안보로 향하며 천여 년 전 신라의 마지막 태자 마의와 덕주공주의 한이 풀리기를 기원해 본다.


1. 송계계곡 :
제천시 한수면 월악산 국립공원 내에 있는 10㎞에 이르는 깊은 계곡으로 월악영봉을 비롯하여 자연대·월광폭포 등 8곡의 산수와 기암괴곡이 잘 어우러져 수많은 관광객과 피서객들이 찾고 있다.

2. 권상하 :
1641(인조19)∼1721(경종1). 조선의 대유학자. 호는 수암, 또는 한수재. 송시열의 수제자로 스승의 뜻을 받들어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우고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배향했다. 기호학파를 계승하여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했다.

3. 하덕주사 :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월악산 영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으며 원래의 자리는 마애불이 있는 덕주사지에 있었으나 6·25로 소실된 후 현재의 덕주골로 이전되었다. 사찰 내에는 불상탱화 및 부도,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옮겨다 놓은 석불입상이 있다.

4. 마의태자 :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아들. 생몰년과 이름은 미상. 신라의 국운이 날로 쇠퇴해져 서남방에서는 후백제의 견훤이 공격해 오고 북방에서는 고려의 왕건이 대군을 몰아 신라의 영토를 잠식해 오자 936년 10월 경순왕은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에의 귀속을 결정했다. 태자는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아버지와 작별하고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초식과 마의로 일생을 바쳤다. 일생을 마의를 입었다고 하여 마의태자로 부르게 되었다.

5. 월악궁지 :
한말에 명성황후가 세우려던 궁터로 현재의 송계초등학교 자리다. 아직도 그때의 석재들을 볼 수 있다.

6. 미륵불 :
미래세(내세)에 성불하여 사바세계에 나타나서 석가모니 다음으로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보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