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바위의 전설과 작성산 무암사
상태바
안개바위의 전설과 작성산 무암사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4.1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부권<2> - 제천시<4>
제천에서 청풍 방면으로 597번 도로를 따라 호수변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성내라는 마을이 나온다. 봉황이 날아가는 형상의 봉비암 바위가 있는 성내리 마을 뒷산을 산길로 3㎞ 가량 오르면 풍광이 뛰어난 곳에 자리한 오래된 절집에 닿게 된다. 이 절집이 천년 고찰 무암사다. 봉황이란 수컷인 봉(鳳)과 암컷인 황(凰)을 함께 이르는 말인데 용이 학과 교접하여 낳았다는 상상의 새로서 봉황이 살고 있는 단혈산(丹穴山)은 태양을 마주하는 길운의 징조를 상징하는 조양(朝陽)의 골짜기이다.

무암사는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 1번지 금수산 자락 작성산(鵲城山, 일명 까치성산, 771m)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이다. 무암사(舞巖寺)의 창건 연대나 창건자를 증명할 문헌이나 유물, 유적은 없지만 절에서 전하는 설화로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라고 한다.

   
▲ 연등을 두른 무암사 극락전 전경. 1740년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 이후의 연혁은 알 수 없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절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의 기록에도 한 때 무림사의 규모가 대단했다는 내용이 있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극락전과 요사채의 지붕에 있는 망와(용마루 끝에 세우는 암막새)에서 ‘건륭 오년’이라고 쓴 명문이 있어 1740년(영조 16년)에 절을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 자연 암석으로 된 바위굴이 있는데, 그 안에 있는 디딜방아에 1920년으로 추정되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역시 절의 내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무암사에는 현재 극락전을 비롯해서 칠성각, 산신당, 수호실,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다. 극락전(極樂殿)은 사방 3칸의 건물로 맞배지붕에 다포양식을 갖추고 있다.

   
▲ 뒤편언덕 위에 위치한 칠성각. 왼편으로 산신각이 보인다. 두 건물 모두 지은지 100년쯤 되었다고 한다.
지붕에 있는 기와에 1740년에 해당되는 연호가 있어서 극락전도 이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방위는 서남향으로 주춧돌은 윗면을 평평하게 다듬은 자연석을 사용했으며, 기둥의 재질은 싸리나무처럼 보이지만 느티나무의 일종으로 추정된다.

안에는 아미타불상, 지장보살상이 있고, 불화로는 아미타불이 그려진 후불탱화와 신중탱화, 지장탱화가 있다. 아미타불좌상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목조불로 되어 있는데 높이 1m, 어깨너비 60㎝ 크기로 목조 연화대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을 하고 있다.

두 손은 각각 별도로 만들어 팔목에 끼운 것이다. 본래는 양쪽의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 또는 지장보살상이 있었을 것인데, 지금은 조성한 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아 보이는 지장보살상만 있다.

극락전 안에는 3점의 탱화가 있는데, 후불탱화와 신중탱화 그리고 지장탱화가 있다. 아미타후불탱화, 지장탱화는 1931년 호영삼천 금어 스님이 그렸는데, 호영 삼천 스님은 1933년에 경북 문경시의 대승사 묘적암 아미타후불탱화를 그린 금어이다.

신중탱화는 1951년에 그려진 연도만 알려졌을 뿐 작가는 알 수 없다. 후불탱화는 가로 279㎝, 세로 243㎝로, 그림 중앙에 석가여래가 앉아 있고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좌우로 서있으며 앞에는 신장이 서 있다. 신중탱화는 가로 150㎝, 세로 144㎝로 중앙에 동진보살이 서 있고 좌우에 각각 3명의 신장이 그려져 있다.

지장탱화는 가로 246㎝, 세로 213㎝로 채색한 그림이며, 그 중앙에 지장보살이 앉아 있고 좌우에 십왕상이 그려져 있다. 칠성각과 산신각은 지은 지 100년 정도 되었다고 하며, 맞배지붕에 각각 사방 1칸의 규모이다. 칠성탱화는 가로 155㎝, 세로 123㎝의 크기로 그림 중앙에 칠성여래가 앉아있고 좌우에 천왕, 보살, 성중들이 묘사되어 있다.

산신탱화는 산신각 안에 있으며, 가로 108㎝, 세로 184㎝로 그림 중앙에 노인이 큰 범과 동자를 데리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무암사에서 산 쪽으로 올라간 곳에 소부도골이 있는데 이곳에는 수월당 부도와 우부도가 있다.

수월당 부도는 조선시대의 부도로서 높이 180㎝이다. 화강암석을 둥글게 다듬은 대석 위에 좌대석, 탑신석은 각각 다른 돌로 만들어 놓았다. 어느 때인가 땅속에 묻혀 있었던 것을 1959년 3월 10일 이 절 주지로 있던 안현경 스님이 우연히 부도 개석의 일부를 발견하게 되어 파 보니 부도였다.

1961년 9월 20일 길일을 택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우부도는 무암사 창건 당시 의상대사가 아름드리 나무를 다듬은 재목과 기와 등을 힘겹게 나르고 있는데 어디선가 소 한 마리가 나타나 일을 도와준 덕에 손쉽게 절을 지었다. 후에 이 소가 늙어 죽어 소를 화장하였더니 오색 영롱한 사리가 나와 소의 불심에 감동한 대사는 사리탑을 세우고 안치하였다. 이후 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소부도골이라고 불렀고, 우부도는 일명 ‘소부도’로 부르기도 했다. 현재 탑신만 남아 있으며, 높이가 190㎝이다. 이러한 연유로 우암사(牛岩寺)라 부르게 되었다.

   
▲ 작성산 배바위 . 마치 노 스님이 깊은 참선에 든 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 '노장암'이라 불린다.
우암사가 무암사로 불리어지게 된 것은, 오랜 세월에 무너진 절을 새로 지었는데, 극락전에서 서남쪽으로 약 1㎞ 되는 지점의 건너편 산등성이 보면 큰 바위가 하나 있다. 이 바위는 높이 약 5m, 둘레 3m 정도로 검은빛을 띠는 화강암인데 멀리서 보면 마치 노스님이 깊은 참선에 들어가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노장암’으로 불리고 있다. 이 노장암에는 무암사와 관련하여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풍수설에 따르면 절 입구에 중모양의 바위가 있으면 절의 맥이 끊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식량도 넉넉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바위는 맑을 때는 두 개로 보이다가 안개가 짙은 날이면 두 개의 바위가 한 개로 겹쳐서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후에 사람들이 안개바위 또는 무암(霧巖)이라 부르고 절 이름도 무암사(舞巖寺)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암사에는 동(銅)으로 된 종이 있는데 무게가 75㎏이고 종 표면에는 1922년 5월 1일 일본에서 주조되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절에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불기와 불반은 놋그릇 제품으로 100년 이상 된 유기제품이며, 촉대와 위패는 정교한 솜씨로 조각하여 만든 특색있는 유품이다. 사찰의 유물들로 보아 상당한 역사를 지녔을 것으로 생각되나 사적기가 없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