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미쳐사는 청주시립예술단 사람들…

2003-01-16     충청리뷰
돈보다는 자긍심과 사명감이 큰 지역의 예술가들
“시민을 위한 무료공연과 무료강습 올해도 꾸준히 이어갈터”

시립예술단은 시가 운영하는 예술단체다. 그러니 단원들은 예술을 업으로 국가의 녹을 받는 준공무원 정도로 볼수 있다.
그러나 시에 속해 있기 때문에 제약도 많고 해야할 일도 많다. 예술과 시민을 위한 서비스 사이에서도 갈등해야 하고, 개인창작의 기회도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다.
시립예술단은 분과별로 해마다 100회가 넘는 공연을 펼치며 또한 95년부터 진행해온 무료강습, 찾아가는 공연들이 정착화되고 있다.
충청리뷰는 시립예술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을 만나보았다. 그들의 사는 모습 A부터 Z까지 이야기들을 모았다.

“가야금 연주자로, 두아이의 엄마로, 대학원생으로…”
시립국악단 상임단원 류재춘씨


류재춘(35)씨는 시립예술단의 원년멤버로 8년동안 줄곧 가야금을 탔다. 가야금을 ‘함정에 빠지는 악기’로 표현하는 류씨는 “배우기는 가장 쉽지만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악기”라고 정의한다.
어려서부터 민요테잎을 즐겨들으며 구성진 가락을 따라 불렀다는 그는 관심은 있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뒤늦게서야 가야금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며 돈을 모아 가야금을 샀고, 직접 선생님을 찾아가 레슨을 받았다. 남들보다 욕심이 많은 편인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가야금을 탔고 대학에서 가야금을 전공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4학년 재학당시인 스물 일곱해에 시험을 통과, 당당히 시립예술단의 문을 두드리게 된 류씨. 그는 8년전 그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오전 9시부터 6시까지 연습을 강행했지만 국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터라 일년에 정기공연인 8회의 공연외에는 초청하는 곳이 단 한군데도 없었다. 또 습기가 올라와 악기에 곰팡이가 핀적도 여러번이었다.” 그 당시 월급은 60만원선. 8년차인 류씨의 봉급은 현재 연봉 1500만원선이다. 또 신입단원의 경우 연봉 1천만원 미만으로 이 모두는 공무원 월급에 준해 지급된다고 한다.
한편 류씨는 시립국악단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아직까지 단원들의 수가 관현악을 소화하기에는 턱없기 부족하다. 매번 공연을 할때마다 돈을 주고 객원연주가를 불러들이는 형편이니 무엇보다도 자체적인 단원확보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매년 한차례의 테스트를 통해 단원의 실력을 평가하는 것도 수시·상시평가제로 바꿔야한다고 주장했다. “예술이라는 것이 언제나 고정적인 답을 내는 것이 아닌데 한번의 평가로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는 것이다.
또한 공연연습시간이 오전 10시부터 3시로 축소됐지만 공연횟수는 연간 100회 정도 된다. 한달에 10번을 할때도 있고 하루에 서너차례 공연을 뛰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들쭉날쭉한 공연들은 가정을 꾸리고 있는 류씨에게 가장 큰 고민꺼리이기도 하다.
5살, 6살 연년생의 남매를 키우고 있는 그는 엄마로써 불규칙한 공연일정때문에 아이들을 이리저리 맡기러 돌아다니는 작은전쟁을 치룬다. 이에 류씨는 아이들에게 가야금을 타며 특별한 엄마표 자장가를 불러주어 점수를 딴다고 했다.
정해진 연습시간이 끝난 오후시간에는 이론공부와 레슨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그는 “동양음악의 전반적인 이론과 실제를 터득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또 올 3월부터는 중앙대 대학원에서 가야금 공부를 이어나갈 예정이며, 2인 연주회형식의 작은 음악회도 계획하고 있다. 류씨는 “전통이 전통을 이을 수 있고, 이길수 있다”며 “인생최대의 꿈은 북한에서 산조한바탕을 멋드러지게 연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무장은 곧 매니저다”
시립무용단 단무장 이유자씨

시립무용단은 훈련장·단무장·상임단원 등 총 17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무장의 역할은 한마디로 공연을 잘할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는 것. 행정처리부터 공연스케줄까지 세밀한 계획을 세워 단원들은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시립무용단 단무장인 이유자(34)씨는 “원래 무용을 전공했지만 행정, 기획파트의 일이 잘 맞는다”며 “올해에는 기획과 관련하여 박사과정 시험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전주우석대를 졸업하고 청주대 예술대학원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박재희 무용단’에서 공연기획의 행정적인 부문을 담당했던 그는 2년전 공석이 된 현 시립무용단 단무장으로 자리로 옮겼다.
아직까지 춤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다는 이씨는 그래서 매주 1회 청주대 박재희 교수가 이끄는 ‘벽파춤 연구회’에서 춤을 배우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또 오후시간에는 아이들 레슨과 공군사관학교 강의를 나가고 있다. 그는 “때때로 북도 날라야 하는 등 힘쓰는 일도 많고, 업무량도 많은 편이지만 무용단의 공연이 향상되고 관객들의 반응이 좋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편 그는 “무용단의 경우 신입단원 공급이 몇년째 정체되어 있어서 공연을 할때마다 객원 무용수가 투입되기 일쑤이고, 또한 지하에 위치한 좁은 연습실은 실제 무대와 차이가 커 단원들이 거리와 호흡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토로했다.
무용단 단무장으로서 또한 맏언니로서 사람들을 일일히 챙겨야하는 수고스러움이 그에겐 천직인 듯 보인다.
가장 힘들때는 역시 시와 단원들간에 의견조정을 할 때라는 이씨는 올해소망중에 무용단 발전을 빼놓지 않았다.

“영원한 춤꾼으로 살고 싶다”
시립무용단 수석단원 강민호씨

“한국무용의 가장 큰 매력은 곡선입니다” 시립무용단 수석단원인 강민호(35)씨는 물이흐르듯 이어지는 춤사위를 볼때마다 아직도 마음을 뺏긴다고 한다.
강씨는 서른을 넘긴 중견무용수이다. 그는 중학교 2학년때 엄마를 따라 시장에 나선것이 우연찮게도 무용을 업으로 삼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시장내에 무용학원이 있었고 거기서 들리는 한국가락에 취해 무작정 걸음을 옮긴 것. 그곳에서 한국무용을 처음 본 그는 도저히 눈을 뗄수가 없었고 야릇한 훔쳐보기는 두달동안 계속됐다. 강씨는 그렇게 무용을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당시 남자가 무용을 한다는 것에 대한 편견과 벽은 높기만 했다. 아버지의 반대뿐만아니라 또래친구들의 놀림은 무용을 몇번이나 포기하고 싶은 궁지로 내몰았다고 한다. 유일한 후원자였던 어머니의 힘을 얻어 그는 중학교 3학년때부터 본격적으로 무용을 시작했고, 드디어 서원대 무용학과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하게 된다.
그러나 남자가 춤을 추는 것에 대한 사회의 편견도 두려웠지만 개인적으로 자기확신이 없어서 긴 방황의 터널을 건넜다는 강씨는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서울 방송사에 취직하여 잠깐동안 오락무용을 한적도 있다. 또 그는 군대를 마치고 돌아와 복학을 미루고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 “다시는 춤을 추지 않겠다는 결심을 갖고 떠난 여행이었다”고 회고하는 강씨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낯선땅에서 춤에 대한 열정을 확인하고 돌아오게 된다. 그것은 바로 ‘가부끼 공연’이었다. 온통 하얀 분칠을 하고 공연내내 사소한 움직임만을 표현하는 이 공연을 보고 강씨는 무대예술의 매력에 흠뻑 취했다.
더이상 무대를 떠날수도 춤을 그만둘 수도 없었던 강씨는 복학을 하고 윤덕경무용단, 새암무용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95년 시립무용단 창단과 함께 현재까지 8년여의 세월을 무용단원으로 살았다. 2000년부터는 수석단원으로 위치도 확고히 했다.
“해마다 공연인구도 관람수준도 높아지고 있다. 처음 공연을 할때만 해도 공연이 지루하고 어려워서, 또 관객과의 호흡을 맞추지 못해 비난을 보내는 이들도 많았다” 고 회고하는 강씨는 “작년 연말에 했던 ‘루돌프 사슴코는 왜 빨갛지’ 기획공연은 특히 관객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무용공연을 보고 인터넷 서평을 빼곡히 남긴 것을 보고 관객의 수준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지금은 일년 중 무용단 활동이 가장 뜸한 때. 오전 10시부터 3시까지 정기연습이 끝나면 단원들은 각자 창작활동 구상과 개인시간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강씨는 요즘 모처럼 짬을 내서 서점을 애용하고 있다. 시를 테마로 작품을 구상한다는 그는 서점에 갈때마다 메모를 한다. 시를 읽을때, 또한 사람들을 관찰하며 습작을 남기고 이를 토대로 다음작품을 구상한다. 지금은 레일로도, 백비(하얀 비석), 물방울(콘체르트)에 대한 텍스트를 남기고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지난해 젊은 안무가전에서 ‘꽃섬’을 열연했던 강씨는 올해에도 창작작품을 무대에 꼭 올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혼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직 할일이 너무많다”며 “내 소망은 영원히 춤을 출 수 있는 춤꾼으로 남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