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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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 김명기
  • 승인 2004.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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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수녀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 (마태오 7:13~14)

자신의 삶이 미리 내정돼 있다고 믿는 이들을 두고 우리는 숙명론자라고 한다. 돌이켜생각해 볼 때, 그 길이 아니면 자신의 삶의 길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그러나 그 삶이 행복한 것이었든 그렇지 아니했던 것이었든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적응해나가는 양태의 삶을 사는 이들이 대부분의 숙명론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라 하겠다.

   
김경숙 수녀(베드로·40)는 숙명론자에 가까운 듯 보인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 자신이 걸어온 삶이 주께서 주신 하나의 은총이요, 스스로 걸어가야만 할 하나의 길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김 수녀가 영세를 받은 것은, 그러나 꽤 늦은 나이였다. 1987년 6월이었으니까,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생활을 어느 정도 한 뒤에야 영세를 받은 셈이다.

“친구 어머니가 계셨는데, 어릴 때부터 유독 저에게만 그러시는 거예요. ‘경숙아, 넌 꼭 수녀님 되거라.’ 그러더니 그렇게 됐네요. 그때엔 몰랐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섭리로 느껴져요.”

하긴 김 수녀가 결혼을 안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꼭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지만, 그저 남들 사는대로 평범한 세상살이를 살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던 것이 마치 미리 정해진 운명처럼 자연스럽게 그녀는 수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김 수녀는 원주간호전문대 81학번이다. 부친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그런 까닭에 부친의 전근지를 따라다녀야 하는 가족들의 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 원주, 영월, 태백 등지로 부친이 학교를 옮길 때마다 ‘대부대’가 이동해야 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의 특징이 있잖아요? 아껴써라, 절약해라. 늘 그런 말씀을 듣고 자랐어요. 화장실 큰 볼일은 화장지 4칸, 작은 볼일은 2칸. 연습장도 시험 보고 난 이면지를 쓰고 말이죠. 새 것 한 번 써보는 게 어릴 때 꿈이었으니까요. 딸 넷에 아들 하나였는데, 방학 때만 되면 딸들이 모여 아버지 반 아이들의 시험점수를 매기고 그랬죠. 5년 전에 작고하셨고, 어머니는 2년 전에 작고하셨는데, 개인적으로 불효를 끼쳤다 싶어 마음 고생도 참 심했죠.”

김 수녀의 집안은 불교집안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영세를 받으면서 가족들과 신앙적인 갈등이 컸었다고 한다. 급기야 김 수녀가 꽃동네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부터 오웅진신부와 부친간에 대판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그것이 새로운 인연의 길로 열려 부친과 모친 모두 대세를 받고 베드로와 마리아라는 영세명을 얻고 영면했다.

“어린시절 참 개구쟁이였어요. 딸 넷에 막내가 아들이었는데, 전 우리집의 아들처럼 자라났죠. 여자들이 하는 놀이는 도무지 시시해서 재미가 없었고, 구슬치기, 딱지치기가 제 특기였고, 여자 아이들 놀고 있는 고무줄을 끊어 모으는 재미도 쏠쏠했어요. 인근에 악동으로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으니까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성격이 바뀌게 됐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직업과 무관하지 않았어요. 이곳저곳 전근을 많이 다니시는 아버지를 따라 저도 정 붙일 만하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는데, 이별에 대한 상념이 끊이지 않더군요. 사람과 사람 사이 이별이란 무엇인가. 헤어짐이란 우리 인생에서 어떤 의미인가. 혹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 그 나뉨, 그 별리別離는 또 무엇인가. 자연스레 조용한 소녀의 모습으로 성격이 바뀌게 되더군요.”

초등학교때부터 그녀를 지켜보며 늘 온화한 웃음과 그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친구의 어머니는 그녀의 대모가 돼주었고, 신앙의 인도자가 돼주었다. 그것이 단초가 돼 깊은 신앙, 수도자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고 김 수녀는 술회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녀는 간호사가 됐다. 병원 임상 3년을 지나 사직을 하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난 받고만 살아왔다. 그러면 남을 위한 일은 무엇인가?’

봉사활동은 그녀가 대학생활 내내 생각해왔던 부분이었다. 일반 병원에서의 임상도 봉사활동을 하기 위한 하나의 경험을 쌓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녀는 삼육재활원을 염두에 두고 원서를 냈다. 그 곳에서 답장이 왔다. 당장 오라는 것이었다. 그녀도 마음이 쏠렸지만 종교가 틀린 것이 마음의 부담으로 남았다. 진로를 두고 고민하고 있는 그녀에게 대모님이 말했다.

“세례를 받았으니 천주교 재단인 곳으로 가는 게 더 좋지 않겠어? 꽃동네가 그런 곳이라더군. 그 곳은 용돈도 안 나온대. 그러니 참 봉사를 할 수 있지 않겠나 싶어.”

그런 곳이 있었나 싶어 그녀는 꽃동네에 편지를 썼다. 꽃동네 수련장 수녀님은 답신 전화를 주시며 “당신이 이 곳엔 꼭 필요합니다. 한 번 찾아와보세요”라고 말했다.

1988년 3월 1일 정오에 그녀는 꽃동네에 왔다. 처음 오면서 그녀는 몇 년간 봉사활동을 할 요량이었다. 집에도 3년간 봉사활동을 하고 오겠다고 했다. 소공동체인 줄 알았던 꽃동네는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가족들도 대규모였다. 자연 환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집안에선 꽃동네에 대해 알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름이 아름다워 그저 편한 곳으로만 여겼던 꽃동네가 부랑인과 장애인, 거지들이 시설에서 생활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의 집안에선 당장 난리가 났다. 금쪽같이 키운 딸을 그런 험한 곳에서 고생하게 놓아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주일만에 식구들이 대부대를 ‘편성’해 꽃동네로 쳐들어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다. 참 봉사활동을 하겠다던 대학내내의 갈망이 가족들의 반대 때문에 꺾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다시 꽃동네로 왔고, 가족들은 그런 그녀를 다시 데려가고…… 돌아왔다 ‘끌려가기’를 몇 번, 결국은 가족들이 두 손을 들게 됐다.

“그러면 일주일만 하고 오너라.”

일주일이 지나자 그녀는 가족들에게 말했다.

“어찌 일주일만 하겠어요. 적어도 한 달은 해야죠.”

한 달이 지나자 그녀는 가족들에게 또 말했다.

“어찌 한 달만으로 양이 차겠어요. 6개월은 해야죠.”

6개월이 1년 되고, 1년이 3년 되고, 3년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생활이 돼버렸다. 음성꽃동네 인곡자애병원에서 간호 업무를 보면서 그녀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수도자들이었다.

‘저 분들은 꼭두새벽에 일어나 피곤할 텐데 어떻게 늘 저렇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깊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꽃동네에서 1년의 생활을 거친 뒤 그녀는 더 이상 핑계를 대지 않았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길,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됐다.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것,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자.’
그것은 바로 수도자의 길이었다. 험난한 가시밭길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그 길만이 자신에게 놓여진 유일한 길로 여겨졌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설득을 시작했다. 집안에선 결사반대였다. 단 한 사람도 그녀의 참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에게 놓여진 가시밭길을 가족들은 두려워했다. 가족회의가 열렸고, 그녀는 외톨이였다. 회의에서 가족들이 분위기를 몰아갔다.

“야, 이제 경숙이 꽃동네 안 간단다. 우리 모두 축하박수를 치자.”

가족들 모두 기립 박수를 치며 꽃동네행을 말리고 있었다. 사실 어찌보면 우환이 없던 집에 꽃동네의 ‘꽃’자 때문에 근심과 걱정이 쌓여가는 형국이었다. 어머니는 매일처럼 우셨다. 애지중지 키운 딸에게 놓여질 험한 길을 염려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족들의 마음을 그녀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녀가 지향하는 삶이 있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고, 그녀에겐 인생의 최정점이기도 했다.  가족들의 반대가 극심해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자신의 험난한 길을 포기하려고도 했었다.

‘그래, 이제 꽃동네를 잊자.’

선도 많이 봤다. 선을 본 사람 중에 가족보다 꽃동네 행을 더 반대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ROTC 출신의 그는 집안의 사위후보였다. 믿음직한 그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꿈꾸는 삶이 아니었다. 가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선을 보고 세상살이에 익숙해지려 노력은 하고 있었지만 그 생활이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그녀는 진즉부터 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8개월 뒤 다시 꽃동네로 찾아왔다.

“마음 안에 무언가 타고 있었어요. 이성적으로 판단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어요. 수련장 수녀님 말씀이, ‘그것이 바로 성소다’라고 하시더군요.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의무적으로 향하여 가게 되는, 주의 이끄심이었죠. 결국 편지를 써놓고 꽃동네로 도망치듯 왔어요. 밤에 전화를 드리니까 아버지께서 그러시더군요. 잘 도착했느냐고. 극심한 반대를 하면서도 딸아이가 가려는 앞날을 막을 수는 없었다고 미리 마음을 정해놓고 계셨던 거였죠. 그때부터 식구들이 변화하기 시작했어요. 골칫덩어리였던 제가 이젠 가족들에게 긍지의 대상이 되었던 거죠. 우리 딸이 꽃동네에서 봉사의 삶을 살고 있다고 자랑도 많이 하셨죠. 가족들의 마음이 주님께로 돌아서기 시작했던 겁니다.”

   
1991년 그녀는 성소자의 길로 들어섰다. 김 수녀는 그때의 일을 돌이키며 잔잔한 미소를 짓고는 말한다.

“지금 하라면 그렇게 못 할거예요. 그땐 무언가에 뒤집어 씌였던 게죠.”

김 수녀는 예수의꽃동네자매회 수녀의 길을 걷게 됐다. 청빈과 순명, 정결의 정신을 좇아 생활한 지 10여 년. 그 길을 주신 주님께 늘 감사하고 있다.

“글쎄요, 수녀의 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볼 때가 많아요.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게 인간이라면 수도자들은 그 하느님의 나라를 사람들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내보이는 것, 수도자 스스로도 주님 안에서 살며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가시적인 역할, 그것이 수녀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요. 현실에서 비롯되는 거리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로 인한 갈등이 일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스스로 채찍질을 하며 죽을 때까지 짊어져야 할 숙명, 그것이 수녀님과 수사님들의 본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집안에서 보낸 8개월 동안 그녀는 괴로웠었다. 선명하게 그어놓은 인생의 경로, 그 경계선을 허락하지 않은 가족들과 마찰이 빚어진다는 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가족들 또한 그녀의 삶을 진정으로 걱정하기 때문에 그런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선명하게 그어져버린 봉사의 삶을 그녀는 버릴 수 없었다.

그때마다 김수녀는 성모님을 떠올렸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모두 인간적으로 불행했던 분, 그러나 인간적인 번민보다, 세속적인 고뇌보다 잔잔한 미소를 가졌던 분. 고통스럽다고 평화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그녀는 성모님의 미소를 통해 배웠다. 그리고 그 분의 삶을 좇아가리라 다짐했었다.

“호스피스 임종 환자를 10년 넘게 보아왔는데, 정말 아쉬운 것이 한 가지 있어요. 제가 한 번도 죽어본 경험이 없어서 임종환자만이 가질 수 있는 소망과 아쉬움을 모두 풀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죠. 이젠 척 보면 알 정도랍니다. 저 분이 몇 년을 사실 것인지, 몇 개월을 사실 것인지, 몇 시간 뒤에 주님의 곁으로 가실 것인지 말이죠. 그것이 확연히 느껴져요. 임종을 맞으시는 형제 자매님들을 위해 봉사자, 직원, 수녀님들이 모여 기도를 해드립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 무언가 해드려야만 할 것이 더 있을 것 같아요. 세상을 마치는 입장에서 갈망하게 되는 것이 무얼까? 그것을 명징하게 알 수 없어 안타까워요. 마음 다해 기도를 드리지만 그래도 미진한 부분, 마지막 가는 분께 따뜻한 모습의 무엇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죠. 많은 환자분들이 임종 직전에 잠깐 의식을 회복하시는데, 그 시간에 해드릴 수 있는 부분을 찾아야겠지요. 그것을 알지 못 하니 전 죄인입니다. 업무로 열심히 일하는 만큼 임종환자들을 지켜드리지 못 하게 되는 죄책감, 주님 뜻은 임종환자인데 내 일만 열심히 했지 싶어 마음이 무거울 때가 많지요.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주님께 귀를 기울인 제게 주님께서 ‘소근소근’ 하십니다. 무딘 마음을 가지면 들을 수 없는 깨우침을 주신답니다.”

어머니께서 작고하시기 전 당신은 당뇨병으로 큰 고생을 하셨다. 인공투석을 해야 했고 실명까지 갔었다. 김 수녀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 부모님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서 내가 왜 꽃동네에 있는 것일까?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 당시 김 수녀는 성소 위기까지 갔었다고 고백한다. 더욱이 자식이 병을 치료하는 간호사이면서도, 간호사 입장에서조차 해드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꽃동네의 ‘카리스마’가 와해될 뻔한 제 성소위기를 극복해 주었어요. 어느날 오웅진 신부님이 강론하시더군요. ‘쓰러진 노인을 병원에 모시고 가는데, 오늘같이 기쁘고 자랑스러운 날이 없다, 사랑하는 내 아들을 네가 돌봐주니 감사한다. 너와 새 계약을 맺으니, 앞으로 네 이름으로 돌봐 주면 나머진 내가 돌봐 주겠다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오 신부님의 그 말씀으로 전 제 성소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됐어요. 꽃동네에 오시는 분을 성심성의껏 돌봐주면 제 가족들은 주님께서 돌봐주실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죠. 내 목숨 다해 죽기까지 한다면, 그 큰 사랑을 한다면 부모님께 주님의 섭리가 펼쳐질 것이란 깨달음이었죠. 그때부터 마음이 평안해지고 걱정이 없어지게 됐답니다.”

꽃동네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격이 모난 편이다.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닫힌 마음, 상처 받은 마음을 가진 그들에게 다가가면 처음엔 난폭한 반응이 많다. 치료를 거부하고 간호사들과 싸우기 일쑤다. 그러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온화한 미소로 대하다 보면 어느결에 닫혀있던 마음의 빗장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그들이 주님의 품 안에서 새로운 삶을 되찾을 때 김 수녀는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위해, 조금은 움직일 줄 아는 환자가 밥을 먹여주고, 오줌과 똥을 치워주고, 자신 안에 갇혀 있던 마음에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으로 돌아설 때 김 수녀는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참된 세상살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위해 아둥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남을 먼저 배려해주며 서로의 상처를 위무하는, 지체와 지체가 모여 하나를 이루는 꽃동네가족들의 삶과 같이 어우르며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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