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내 분규 ‘특효약’ 운동권 총학 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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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내 분규 ‘특효약’ 운동권 총학 저지
  • 김진오 기자
  • 승인 2006.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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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퇴진·재단반대 투쟁, 학교측 골머리
김준철 총장 사퇴 불구 학생회 회유 여전

청주대 총학생회 선거에 학교측이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담긴 문건이 발견된 것과 관련, 역대 총학생회장이나 임원들은 심증이 사실로 확인된 것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실질적으로 학교측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학도호국단이 80년대 중반 직선 총학생회로 바뀐 뒤에도 ‘학생지도’라는 명분으로 운동권 후보 당선을 방해하고 학교측에 우호적인 후보를 위해 직간접적으로 지원해 왔다는 것이다.

90년대 초반 총학생회 간부를 지낸 장민경씨(35·여)는 “학교측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비운동권 후보가 당선되도록 지원했다는 심증은 항상 갖고 있었다. 다만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서 문제 삼지 못한 것일 뿐 학생회 간부 출신이면 누구나 짐작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번에 문건이 발견됨으로서 그런 심증이 사실로 확인된 것일 뿐이며 크게 놀랄만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실제 운동권 총학생회 활동이 활발하던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청주대 측은 재단 반대 투쟁이 벌어질때 마다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학생회를 회유하고 심지어 향응을 제공, 문제가 되기도 했다.

청주대가 유독 학생회 선거와 활동에 깊숙이 개입을 시도한 것은 청대 총학이 총장 퇴진이나 재단반대운동 등 학내문제를 주요한 이슈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80년대 말부터 10여년 운동권 전성기
80년대 민주화 바람을 타고 군대식 편제의 학도호국단이 없어지고 학생들의 직접·비밀투표에 의한 직선 총학생회가 부활됐다.
청주대 또한 1986년 직선투표에 의해 총학생회가 구성된 뒤로 올해까지 39대째 학생회를 이어오고 있다.
87년 6월항쟁 이후 학생운동의 세력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88년 백상진씨(현 이시종 국회의원 보좌관) 이후 90년대 말까지 청대 총학생회도 대부분 운동권이 장악해 왔다.

청대 총학은 88년 김준철 이사장의 총장 취임에 반대해 100일이 넘는 총장실 점거 농성을 벌이는 등 재단 문제가 학생운동의 주요 이슈로 떠오르면서 학교측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다.

90년대 들어서면서 학내투쟁은 학원자주화운동이라는 새로운 학생운동의 영역으로 자리잡았고 청대 총학은 더욱 강도를 높여 1990년에도 총장퇴진을 요구하며 장기간 농성을 이어갔다.

특히 1993년에 벌어진 학원자주화운동에서 김준철 총장이 전격 사퇴하는 상황까지 발생해 운동권 총학생회의 전성기를 이어갔다.
92년 총학생회장을 지낸 류지봉씨(36)는 “90년도에 진행한 학원자주화투쟁에서는 1만여명의 재학생 가운데 4000명 이상이 연일 집회에 참여하는 등 전국적인 화제를 낳았으며 총학생회장과 부회장이 모두 구속돼 간부만으로 투쟁을 이어가기도 했다. 총학이 학내문제를 주요 이슈로 내세워 지지를 얻으면서 타 대학에 비해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운동권 총학 저지= 학내분규 차단’
1993년 학생운동의 중심이었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얼굴을 바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회(한총련)는 1996년 발생한 연세대 사태 이후 급속히 세력이 약해졌다.
8·15 광복절을 맞아 개최하려던 범민족대회를 앞두고 사전집회가 진행중이던 연세대에서 학생들과 경찰이 충돌해 전경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 이후 정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 가입만 해도 처벌하는 등 초강수를 뒀고 학생운동도 퇴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군인 출신 대통령시대가 끝나고 민주화 분위기가 조성되는 등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사회적 이슈가 약화됐고 한총련도 활로를 찾지 못해 총학생회 또한 대중성을 잃어갔다.
류씨는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8·90년대에도 운동권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한 갖가지 방법이 동원됐다. 워낙 학생운동이 활발했기 때문에 운동권 총학생회가 이어져 왔지만 최근에는 그렇지 못한 것으로 안다. 청대의 경우 재단반대나 총장퇴진 운동이 총학의 주요한 사업이었던 만큼 학교측이 선거나 학생회 활동에 개입을 시도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류씨는 또 “90년대 초반만 해도 운동권 총학에 대한 학생들의 지지가 꽤 높았다. 1990년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전대협을 탈퇴, 한민족대학생연합회를 조직하겠다고 밝히자 학생들이 대거 반대집회를 열어 출범식을 무산시키기도 했었다. 당시 학교측은 물론 경찰이나 심지어 정보기관에서도 총학에 대해 각종 회유와 압력을 시도했지만 통하지 않았고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결국 운동권 총학생회 시절에는 학교측의 개입시도가 성공하지 못했거나 효과가 없었지만 학생운동이 퇴조하면서 소위 ‘약발’이 먹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총장퇴진·재단반대 투쟁이 절정을 이루던 90년대 초반 청주대 학생들의 집회 장면. <제공 청대 신문사>

“총학생회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학생운동의 전진기지에서 학교측 입김까지

총학생회는 학생들의 대표기구다. 지방선거나 총선, 대통령선거가 대의민주주의의 전형적인 형태인 것처럼 총학생회도 민주적 절차에 의해 구성되고 운영되는 것이다. 유신시절 총학생회를 학도호국단으로 바꿔 정권이나 학교당국의 뜻대로 구성하고 움직였던 것이 광주항쟁 이후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부활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따라서 민주화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총학생회는 학생운동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으며 학생들도 이런 활동을 학생회의 주요 사업으로 인식하고 지지를 보냈다.

소위 386세대라고 부르는 30대 후반에서 40대의 운동권 출신 소장파 정치인들 대부분이 이 시기 학생회 활동을 했던 인물들이다. 도내에서도 노영민 의원(연세대)을 비롯해 김형근 전열린우리당충북도당 사무처장(충북대), 송재봉 충북참여연대 사무처장·유수남 강혜숙의원 보좌관·백상진 이시종의원 보좌관(청주대) 등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90년대 말 이후 학생운동 퇴조로 총학생회에서 이념은 거의 사라졌고 학내분규에 노이로제를 앓다시피한 청주대 같은 경우 노골적으로 학생회 선거나 활동에 개입해 왔다는 것이다.

청대 전 학생회 관계자는 “총학생회가 학교측에 우호적으로 변하면서 일부 강성 학생회와 갈등을 겪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실제 2004년 총여학생회장 선거 출마자가 없다는 이유로 총여학생회를 없애기로 결정, 이에 따라 올해 총여학생회가 구성되지 못하는 등 상식적으로 납득하지 못할 일도 발생하고 있다. 운동권 총학생회가 없어지면서 학생회가 학생들의 이해와 요구를 수용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으나 오히려 일부 순수성 마저 훼손당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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