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이 얼마나 고운 아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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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이 얼마나 고운 아픔인가
  • 충북인뉴스
  • 승인 2013.02.27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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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장르 간 융합과 감성의 합작품 <건축학 개론>
내가 원하는 것 무엇인지 깨달음에서 삶의 가치를 찾아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 에세이스트
저서 <생명의 숲 초정리에서>, <즐거운 소풍길>, <문화도시 문화복지>등

내게도 꿈이 있었던가. 아니, 지금 나는 무슨 꿈을 꾸며 어떠한 존재감으로 살아가는가. 시간은 숨막힐 정도로 거친 물살처럼 달리고, 지나간 내 삶의 기록은 속절없다. 지나온 추억에 대한 애틋함이 왜 없겠냐만은 아쉬움과 아픔과 미련 때문에 내 가슴이 헛헛해지는 것을 보면 인생의 마디마디에 나만의 깊디깊은 성장통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젊은날에는 사랑과 우정과 취직에 대한 성장통이, 중년이 되어서는 가정과 직장과 돈과 명예에 대한 성장통이, 그리고 불혹을 훌쩍 넘겨 지천명의 문턱에서 서성거리는 오늘은 존재감과 내밀함과 미래에 대한 아픔을 겪고 있다.

▲ 건축학개론 2012
한국 | 로맨스/멜로, 드라마
2012.03.22
12세이상관람가 | 118분
감독 이용주
출연 엄태웅, 한가인, 이제훈, 수지
이 때문인지 요즘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바람이 내 어깨를 스치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며칠 전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며 두 시간 넘게 눈물만 훔쳤다. 나이 들면서 바보처럼 눈물이 많아졌느냐고 스스로를 질책하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내 마음의 고름, 각다분한 삶의 찌꺼기를 토해내는 것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인생은 짧고 허망하다. 바람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꿈을 꾼다. 꿈이란 본래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 밖의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삶의 존재 이유로 삼는다. 그래서 짧고 허망한 인생 속에서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자박자박 내일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꿈이 있었던가 싶다. 단 한 번도 꿈을 일구지 못했는데 또 다른 꿈을 찾아 나서고 있으니 말이다.

한 때 나는 부농의 꿈꾸었다. 시골의 드넓은 땅과 산과 내가 모두 내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청년이 되어서는 불온하고 어두운 이 세상을 경멸하기 시작했고 성직자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성경과 불경을 뒤적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나마 선생이 천직일 것이라는 착각에 야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선생의 꿈을 빚기도 했다. 아픔이 많은 세상을 등지는 것 보다 세상 속에서 아픔을 치유하는 테라피스트를 꿈꾼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림같은 미술관을 짓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며 영혼이 자유로운 방랑자를 꿈꾼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모든 사람들의 꿈이 현실이 되는 세상을 생각해보면 이 또한 끔찍하지 않겠는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기계화된 세상의 종말이 어떤지 잘 설명하고 있는 않던가. 다만 우리는 꿈을 꾸며, 꿈을 빚어가는 그 노정 자체를 사랑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본다. 그 속에서 인생의 희망과 절망, 욕망과 좌절, 기쁨과 슬픔, 환희와 눈물, 기다림과 그리움, 사랑과 우정, 그리고 아련한 추억과 새로운 미래를 생각한다. 가슴 저리게 아름다운 시간여행을 하고 영화속의 이야기를 통해 나만의 아픔을 치유하고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은 건축양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건축에 대한 개론이 무대 중심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직업에 대한 번뇌나 사회적인 이슈를 화두로 삼지도 않는다. 지천으로 널려있는 진부한 이야기, 그렇지만 누구나 소중하게 간직할 수밖에 없는 ‘첫사랑’에 대한 애틋함과 아쉬움과 잘못된 운명을 잔잔한 스토리와 아련한 풍경으로 안내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있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감성을 정곡으로 찌르고, 세대를 초월한 공감을 이끌고 있다. 첫사랑이란 낭만이자 고독이며, 달콤한 행복이자 쓰디쓴 아픔이며, 아름다운 만남이자 처연한 이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주인공의 성장통이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 것이다.

영화는 서른다섯의 나이, 건축가가 된 승인(엄태웅) 앞에 대학 1학년 때 ‘건축학개론’ 강의실에서 처음 만났던 음대생 서연(한가인)이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서연은 자신의 집을 설계해 달라고 부탁하고, 승인은 자기 이름을 건 첫 작품으로 서연의 집을 짓는다.

함께 집을 완성해 가는 두 달간, 두 사람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첫사랑의 감정이 솟구치지만 미숙한 사랑의 결과가 얼마나 처량한지 말해 무엇하랴. 첫사랑이라는 가당찮고 어처구니없는 착각이 부끄러워 젖멍울 앓는 것처럼 자꾸만 몸이 움츠러드는데,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첫사랑만은 잊지 못하는 기막힌 운명 앞에서 눈물이 난다.

주인공은 저주받는 92학번이다. 그들이 꿈꾸는 사랑과 우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세상과 어떻게 소통하는지를 어리숙한 범생이, 날라리 패션의 납득이, 압구정동의 오렌지족 등의 캐릭터로 설명하고 있다. 삐삐, 공중전화, 필름카메라, 떡볶이 단추의 더플코트, 여대생들이 매고 다니던 배낭 등 당시 유행코드도 섬세하게 되살려 놓았다.

모든 비극은 환상과 미숙에서 비롯된다. 비단 사랑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결과물 모두가 그러하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헤어지기 전에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면 아련한 첫사랑은 추억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을 것이다. 서연은 이혼하고, 승인은 노총각이란 대가를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이해하고 애정을 갖는 것이 건축학개론이라고 말한다.

삶이란 한없이 깊은 오지일 뿐이다. 사랑은 더욱 어렵고 멀고 험해서 입술을 비집고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다. 그렇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으니 이 얼마나 고운 아픔이었던가. 매섭던 북풍한설도 가고 대지는 새싹들이 여릿여릿 고개를 들고 있다. 아픔이 있어도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세상 속에서 느낀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나의 사람과 나의 삶과 나의 세상을 뜨겁게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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