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청주정신 뿌리찾기<1> 청주인의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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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청주정신 뿌리찾기<1> 청주인의 캐릭터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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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락호락하지 않는 고집스런 구석 <황규호>

우리는 지금 개성시대(個性時代)를 산다고 한다. 그래서 누가 자신더러 캐릭터가 없다고 말하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정도가 되었다. 그저 필부필부(匹夫匹婦)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시대가 아닌 모양이다. 그러면 청주 사람들에게 캐릭터는 있는 것일까. 대답은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캐릭터 산업이 쉽게 찍어낸 갖가지 인물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캐릭터다.

   
▲ 청주시 용정동 이정골 선돌. 마을사람들은 물이 내려가는 수구를 막아준다는 생각에서 수구맥이라고도 했다.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龍洞洞) 이정골에서 마주친 돌기둥모양의 선돌(立石) 얼굴은 청주의 캐릭터가 분명했다. 얼굴이 못 생겨서 죄송한 마음이기는 하나, 캐릭터가 예쁘거나 잘나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 보다는 삶의 풍토와 관습이 같은 공동체 사람들이 지닌 어떤 공통분모(共通分母)의 문화적 심성에 더 무게를 싣는다. 바로 캐릭터의 내면성(內面性)이기도 하다. 이정골 선돌에는 '순치9년7월16일입(順治九年七月十六日立)'이라는 새김글씨가 들어있다. 1652년에 세웠다는 이야기다. 백성들이 청주성(淸州城)탈환같은 의병전쟁에 뛰어들어 임진왜란을 몸소 치른지 꼭 반세기가 되는 해였다.

그런 미증유의 난리를 딛고 다시 일어선 민중들은 웃음을 다 잃지 않고 내일을 기다렸다. 분노를 터뜨렸다가도 이내 삼켜버리고, 평상심(平常心)으로 돌아올 줄도 알았다. 그런 착한 사람들이 지었으니, 선돌인들 얼굴을 구길리가 없다. 선돌의 몸통은 길다란 네모꼴에 가깝다. 그 위에다 얼굴을 돋을새김으로 그렸다. 눈은 슬며시 감았다. 그래도 무엇을 보았는지 웃고싶은 모양이다. 아마 이정골 사람들의 잃지 않은 웃음을 보았을 것이다.

얼굴 윤곽은 솔직히 말해서 두루뭉술하다. 코 밑 언저리는 약간 낮추어 코가 그런대로 드러났다. 입은 가로로 길게 그렸다. 그러나 입은 눈과 눈썹, 펑퍼짐한 주먹코에 비해 작다.아랫 입술 언저리에서 입가를 따라 올라간 선이 턱을 좁게 마감하다가 볼로 올라붙었다. 그래서 광대뼈가 꽤 튀어나왔다. 이타(利他)의 착한 마음을 가진 것은 틀림없으나, 어딘가에 호락호락하지 않고 고집스러운 구석이 보이는 까닭은 광대뼈 때문이리라. 청주의 캐릭터가 거기 있다. 또 광대뼈는 북방(北方)에 뿌리를 두었다는 민족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청주 사람들 원초(原初)의 캐릭터이기도 했다.

얼굴 생김새는 장승*을 연상하기 십상이다. 키가 3m나 되어 장승으로 보는데 더욱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마에 돌을 새김한 백호(白毫)가 너무 뚜렷하여 장승이 아니라는 제동이 걸린다. 불상으로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는 새김글씨에 나오는 화주(化主), 시주(施主), 비구(比丘) 따위의 불교용어에 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부처 얼굴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올 만도 하다.

부처라 해도 좋고, 장승으로 불러도 시비할 사람은 없다. 달리 바라보면, 잠을 일부러 청할 겨를도 없이 코를 골아대다 새벽녘 닭 울음소리에 깨어 들로 나갔을 농사꾼 얼굴일 수도 있다. 그 얼굴에서 자기를 찾은 민초들 마음 속에는 어느날부터인가 선돌이 믿음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마을의 허술한 구석, 이를테면 물이 빠져나가는 나지막한 쪽을 선돌이 눌러 줄 것이라는 생각을 믿음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선돌이 수구(水口)를 막아 준다는 뜻에서 수구맥이라고도 했다. 이정골 사람들이 음력 정월달 한날을 잡아 올리는 산제날이면, 선돌은 지금도 대접을 받는다. 제물로는 시루떡, 삼색과실, 돼지머리, 나물 등이 제상에 오른다. 해마다 뽑는 제주 밑에 도가와 축관, 공양주가 따라붙는 제사를 올렸다. 제수비를 마련하는 위토(位土)도 가지고 있다. 제사 때 읽는 입석축문(立石祝文)에는 부처를 말하는 '불상'과 돌장승을 가리키는 '석장'이 함께 나온다. 그러니까 이정골 사람들은 선돌에다 불상과 장승이 할 일을 한꺼번에 안겨주었다. 부처라 해도 좋고, 장승인들 어떠랴는 생각에서 둘다를 믿음으로 끌어들여 고달픈 몸과 마음을 추스렸던 것이다. 청주 캐릭터가 내포한 심성이 엿보인다.

   
▲ 청주시 죽림동 돌미륵. 돌을 다듬은 모양새는 문인석인데, 마을사람들은 미륵을 고집했다.
그 이정골 말고도 또 다른 캐릭터가 있다. 청주시 흥덕구 죽림동(竹林洞)돌장승이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돌장승보다는 미륵(彌勒)이라는 이름을 더 좋아했다. 하기야 흔히 일컫는 마을 이름도 미륵댕이라 했으니, 미륵을 위하는 마음이 극진하다. 미륵의 키는 작아 135㎝밖에 안된다. 그러니 몰골은 이러고저러고 할 처지는 아니다.

그래도 미륵의 얼굴은 착해 보였다. 눈두덩 위가 깊게 파여 눈썹이 그린 것 처럼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눈을 아예 짓감아 버린 미륵의 표정은 웃는지 우는지를 분간할 길이 없다. 코는 밋밋한 데, 입 위로 파인 한 줄기 주름이 콧방울에 와서 닿았다. 볼과 턱에는 살이 꽤 붙었다. 육덕(肉德)이 좋은 중년 남정네로 보이는 미륵은 체면치레를 하느라 관모를 머리에 떡 올렸다. 소시 적부터 붓과 먹을 옆에다 둔 채 서책도 가까이 했던 터라, 그런대로 학덕을 갖춘 얼굴이다.

그래서 얼핏 문인석(文人石)으로 보인다. 굽은 듯 휜 어깨와 팔을 앞으로 모아 놓은 것처럼 몸통을 다듬어 영락없는 문인석이다. 사모까지 머리에 얹어 더욱 문인석을 닮았다. 그럼에도 미륵당이 사람들은 미륵이기를 고집했다. 음력정월 열나흘 저녁에 사사롭게 지내는 제의도 미륵동고사다. 백설기와 명태, 술 등을 차려놓고, 고사를 치르는 동안 미륵댕이 사람들은 미륵 몸뚱이에 왼새끼를 감았다. 그리고 미륵이 수구맥이로 서있는 한 마을이 평안할 것이라고 믿었다. 옛날 마을에 자주 일어났던 불이 미륵을 세우고 나서 잠잠했다는 입소문은 아직 유효한 이야기로 남아있다.

그러나 미륵댕이 미륵은 사실상 미륵이 아니다. 굳이 민속학을 빌어 따지면, 돌장승이다. 18세기쯤 민속신앙과 미륵신앙이 서로 만나 어울린 신앙복합(信仰複合)현상일 뿐 뚜렷한 미륵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을에서 미륵이라고 우길만한 꼬투리도 있다. 일찍 속리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미륵신앙(彌勒信仰)은 기호지방(畿湖地方)민중들 가슴을 깊이 파고 들었다. 그 신앙을 널리 퍼뜨린 이들은 신라에 등을 돌린 반신라(反新羅) 승려 그룹이었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청주지역에서 산 백제유민들에게는 더욱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청주 사람들 가슴을 여전히 사로 잡았는지도 모른다. 이상세계(理想世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다가올 것이라는 미래불(未來佛) 미륵부처는 민중들이 학수고대한 메시아, 그것이었다.

그런데 미륵당이 사람들은 부처도 아니고 장승도 아닌 미륵을 문인상으로 지었다. 선비의 고장이라는 청주의 명성을 쉽사리 저버리지 못해서 그랬을까. 문인을 닮은 돌장승을 세우고 속내로 미륵신앙을 부여한 미륵댕이 사람들의 시대가 보이는 듯하다. 참으로 복잡한 시대를 살았던 청주인 캐릭터가 미륵댕이의 미륵일것이다.     <황규호>

*장승(長丞)
대개 마을이나 절어귀 양쪽 하나씩을 세운 나무인형 목우(木偶)가 장승이다. 본래는 절의 경계를 나타낸 표석(標石)이 장승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나무로 깎은 장승에 관한 기록은 15세기말 서거정(徐居正)이 쓴 ꡐ태평한화골계전ꡑ(太平閑話滑稽傳)에 처음 나온다. 돌로 만든 석장승은 17세기 후반에 나와 18세기에 유행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벽邪)와 거리를 알리는 이정표(里程表)기능을 함께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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