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훈민정음≫ 해례본, 임금과 신하들의 아름다운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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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훈민정음≫ 해례본, 임금과 신하들의 아름다운 공저
  • 김슬옹
  • 승인 2024.03.28 17:1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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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을 위해 공동저술 택해...창제는 단독으로

세종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신하들과 공저 방식으로 한 것은 훈민정음을 살아남게 하려는 치밀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은 양반 사대부가 세우고 사대부가 중심인 나라였다. 사대부에게는 중화 사대주의는 핵심 정치 이념이었고 중화 사대는 한자, 한문이 절대적인 상징이요 장치였다. 한자 이외의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아무리 임금이라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치적 혁명보다도 더 혁명다운 혁명이었다.

세종은 최만리 등 7인의 훈민정음 반대 상소(1444)가 아니더라도 그런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사대부와 함께 하지 않으면 훈민정음은 절대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임은 불보듯 뻔하다. 그래서 창제는 단독으로 했더라도 보급만큼은 사대부와 함께해야 했다. 그래서 해례본 저술을 공저 방식으로 한 것이다.

사대부들의 가장 존경을 받는 직책인 대제학의 정인지를 신하 측 책임자로 한 것은 사대부들의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중진 학자인 최항을 다음으로, 나머지 20대 패기 넘치는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의 사대부들을 공저자로 함으로써 미래지향적 포석은 더욱 굳건해졌다.

<그림 1> 《훈민정음》 해례본의 짜임새(정음편은 세종이 직접 짓고 정음해례편은 8명의 신하가 지었다.)

공저이지만 단순한 공저는 아니다. 세종이 직접 저술한 <정음편>을 자세히 풀어쓰게 했기 때문이다. 곧 ‘세종 등 9인의 공저’가 아니라 ‘세종 외 8인의 공저’인 셈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임금이 직접 집필한 부분과 신하들이 집필한 부분에서도 임금과 관련 부분을 다르게 편집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문책의 보편적 특징이다. 인도의 불경을 한자로 번역한 책도 마찬가지다. 본문에 해당하는 부처의 말은 큰글자[大字]로 쓰고 이를 풀이한 스님들의 주해 자는 조금 작은 중간글자[中字]로 썼다. 그러나 중국 문헌에 이런 짜임새를 철저히 지킨 문헌은 매우 드물지만 해례본에서는 철저히 지켜 편집했다.

'정인지'를 책임자로

먼저 세종이 직접 저술한 부분과 신하들이 풀어쓴 부분의 차이가 확실히 드러난다. <그림 2>를 보면, 반곽을 기준으로 세종이 쓴 부분은 7행에 11자 칸, 신하들이 쓴 부분은 8행에 13자 칸으로 짜여 있다. 결국 임금이 쓴 부분이 세로로 한 행, 두 글자가 적어 상대적으로 글자 크기가 크다. 한 칸만 본다면 세로 높이와 가로 너비가 각각 약 203×233mm, 170×204mm로, 세로는 약 30.3mm, 가로는 29mm 차이가 난다.

<그림 2> 임금(7행 11자)과 신하 저술 부분(8행 13자)의 행과 글자 수 차이

〈사진 1〉은 실제 책의 모습으로 임금이 쓴 정음편 마지막 부분(정음 4ㄱ)과 신하들이 쓴 첫 부분인 정음해례편 제자해 첫 부분(정음해례 1ㄱ)이다. 같은 글자인 ‘聲’의 크기가 다르다.

글자 크기가 다른 만큼 글자 모양도 일부 다르다. 임금이 쓴 글은 주로 또박또박 쓴 해서체로, 신하들이 쓴 글 일부는 조금 흘려 쓴 행서체로 되어 있다.

신하들이 쓴 부분에서 임금을 높이는 구조는 ‘줄바꾸기(대두법擡頭法)’와 ‘칸비우기(공격법空格法)’, ‘칸내리기’ 신하 쪽의 ‘글자 작게 하기’ 등이 있다.[해례본에서의 이러한 짜임새에 대해서는 “김주원(2013)의 ≪훈민정음: 사진과 기록으로 읽는 한글의 역사≫(민음사)에서 제일 먼저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사진 1> 세종이 직접 저술한 부분(왼쪽)과 신하들이 풀어쓴 부분의 글자(聲) 크기 비교
<사진 2> 《훈민정음》 해례본의 줄 바꾸기

줄바꾸기는 <사진 2>에서처럼 임금을 직접 지칭하는 말(전하殿下)이나 관련한 말(대지大智, [임금의 큰 지혜])이 나올 때 행이 끝나지 않아도 빈칸으로 처리하고 행을 아예 바꾸는 방식이다.

해례본은 중요 부분(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을 칠언고시(七言古詩)로 간추려 적었다. 하지만 임금이 주체가 되는 구절에서는 칠언고시일지라도 줄을 바꾼다. 〈사진 6〉의 왼쪽은 합자해 갈무리시의 마지막 부분인 ‘정음해례24ㄱ’이다. 칠언고시 형식을 유지하면 용자례를 새로운 쪽에서 시작해 보기에도 깔끔하게 편집할 수 있지만, 행위의 주체가 임금이기 때문에 ‘一朝(일조)’라는 두 글자만 쓰고 줄을 바꿨다. 글의 내용은 ‘一朝 / 制作侔神工(하루아침에 / 신과 같은 솜씨로 정음을 지어 내시니) 大東千古開曚矓(우리 겨레 오랜 역사의 어둠을 비로소 밝혀 주셨네.)_[정음해례 합자해 갈무리시 마지막 두 행] ’와 같다. ‘開’의 주체도 임금이지만 내용상 두 구절이 이어진 것으로 보아 마지막 행에는 줄을 바꾸지 않았다.

다음은 칸 비우기 방식이다. 〈사진 3〉의 첫 번째 사진을 보면 세자를 높이기 위해 위 칸을 빈칸으로 처리한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3> 해례본의 ‘칸비우기’(첫 번째)와 ‘칸비우기(두 번째)’ , ‘글자 작게하기’(세 번째)

칸내리기 방식은 〈사진 3〉의 두 번째 사진인 ‘정인지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인지 서문의 앞부분은 용자례로 임금의 말씀(정음)에 대하여 신하들이 해설한 글이라 전체 글자 크기만 줄였다. 이와는 달리 ‘정인지서’는 신하가 직접 지은 부분이기에 한 칸 더 내려썼다.

글자 작게 하기 방식은 <사진 3>의 세 번째 사진처럼 ‘정인지서’에서 신하들을 가리키는 ‘臣(신)’과 성을 제외한 이름[彭年(팽년)]을 일반 글자보다 반 정도 줄이는 방식이다.

이렇게 임금과 세자를 높이는 특수 편집 방식이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비실용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을 펴내기 위해 하나의 글자도 허투루 여기지 않은 세심하고 경건한 편집을 보여 주는 방식인 것만은 분명하다. 해례본을 읽고 살펴볼수록 경이로운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이 글은 2023년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최초 복간본의 필자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의 탄생과 역사≫(가온누리)를 대중용으로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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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국 2024-04-03 19:22:09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뿐 아니라 반포에도 엄청난 계획이 있으셨네요

전연주 2024-04-03 19:21:00
이 글을 통해 해례본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이 각각 집필한 부분을 글자 크기와 글자 모양을 다르게 하거나 줄 바꿈으로 그 차이를 뚜렷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그 명확성이 후대에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겠죠?

서진숙 2024-04-03 19:09:48
제목 그대로 아름다운 공저라는 증거가 다양한 편집 방식으로 등장하네요.
지혜롭고 아름답습니다.
천재 세종대왕이 백성들만 어엿비 여긴 것이 아니라 사대부 신하들을 참으로 사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최정자 2024-04-03 18:29:11
조선 시대 책을 적을 때도 이런 원칙이 있었다니 이 글을 읽고 처음 알았네요.
임금과 신하의 경계를 도서 편찬시 편집에도 반영을 해서 군신관계의 위상과 임금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표함으로써 유교나라의 면모를 드러낸 부분이 인상 깊은데 오늘날 어른에 대한 존중이 사라져가고 부모,자식간 비윤리적인 사건이 많은 우리 사회가 본받아야 할 점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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