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는 기억의 조각을 맞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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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는 기억의 조각을 맞추다
  • 이기인 기자
  • 승인 2024.09.25 1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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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문화예술교육 현장역량강화사업 ‘낯선 일상에게’
프로그램 퀼트 예시작.
프로그램 퀼트 예시작.

가족의 빈자리로 인한 낯선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주목받고 있다, 지난 19일을 시작으로 10월 31일까지 매주 목요일 청주문화의 집에서 진행 중이다.

이번 ‘낯선 일상에게’라는 기획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황귀영, 이현숙, 홍우선 세 사람의 협업은 문화예술의 힘으로 똘똘 뭉쳤다. 각자의 삶과 이력은 달라도 미술치료와 문화기획자로 중첩되며 문화예술이 일상에 침투하도록 앞장서는 문화예술 첨병이다.

현대사회는 개인에게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과거 코로나로 인해 면회가 제한되면서 고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거나 장례를 못 치른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여러 심리적인 문제를 껴안은 채 일상으로 복귀해야 했던 사연이 너무도 많다. 이런 고통의 문제에 직면한 이들을 온전히 애도의 과정을 거쳐 일상으로 회귀하도록 돕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깊은 상실의 경험자는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문화예술교육 활동은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주며 삶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

‘낯선 일상에게’는 충북문화재단 충북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 주관하는 ‘2024 문화예술교육사 현장역량강화사업’의 선정단체인 청주문화의 집이 사별을 경험한 유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다. 참가자는 사별을 경험한 유가족이다. 나이 제한 없이 가족단위가 아닌 개인이며, 1기수 10명으로 제한된다.

일상의 공백 ‘부재’

사별을 경험한 이들은 고인의 부재로 인한 일상의 공백을 느낀다. 기획자는 이런 낯선 일상을 적응해가는 이들을 주목하고 잠시나마 이들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제목을 ‘낯선 일상에게’로 지었다. 프로그램은 크게 3단계의 흐름으로 구성됐다.

먼저 ‘상실과 마주하기’는 앞서 애도를 표현했던 예술가 곤잘레스 토레스, 라파엘 로자노 헤머의 작품을 함께 감상하고, ‘두 가지 편지쓰기 활동’을 통해 고인과 ‘사별과 마주한 나’에게 편지를 써보는 활동이다. 이 시간을 통해 고인을 떠올려 보고, 자신에게 내재된 슬픔에 대해 느껴본다.

 

1차 수업 장면
1차 수업 장면

‘표현하기’ 활동에서는 ‘에이즈 메모리얼’의 퀼트 작품을 감상하고, 고인을 떠올리며 퀼트 작업을 진행한다. ‘퀼트’는 다양한 자투리 천을 이어, 새로운 형태로 탄생시키는 공예이다. 지난 시간 고인에게 쓴 편지를 참고해, 고인을 향한 기억의 편린들을 하나씩 모아 추모할 수 있는 나만의 퀼트 작품을 만든다.

3단계 ‘나아가기’ 시간에서는 청사진(시아노타이프)에 대한 이야기와 정의를 시작으로, 일상 속 고인의 부재를 느꼈던 경험을 공유하며, 현재의 나를 위한 글, 그림 등을 청사진 기법으로 표현해 보는 시간이다. 이를 통해 변화된 일상에 적응하는 자신에게 집중한다. 이 부분에서 이현숙 강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감정을 해소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경청하고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존중,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1987년 10월 11일 미국 워싱턴D.C 내셔널 몰 공원에는 가로 세로 183*91cm의 조각보 1920개를 엮은 ‘에이즈 메모리얼 퀼트’가 전시됐다. 천 조각 하나하나는 희생자의 무덤을 상징했다. 공원 광장을 거대한 공동묘지로 만든 퍼포먼스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대응에 미온적인 정치권과 보건당국을 향한 침묵의 항변이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에이즈 희생자는 1000명을 넘었다. ‘The NAMES Project Foundation’이란 조직이 이끄는 퀼트보 캠페인은 미 전역으로 확산됐다. 뉴욕과 LA, 샌프란시스코, 애틀란타의 동성애자 운동단체들이 동조했고, 에이즈로 연인과 친지를 잃은 개인은 각자의 방식으로 조각보를 제작해서 재단에 보냈다.

퀼트는 미 전역을 순회하며 점점 커졌다. 백악관 엘립스 잔디광장에 펼쳐진 퀼트 조각보는 8288개였다. 조각보의 소재도 섬유, 스웨이드, 가죽, 밍크 등으로 다양해졌다. 퀼트는 거대한 추모공간인 동시에 분노의 플래카드였고, 수많은 시민이 공동제작한 예술품이었다. 한 조각 천으로 시작한 이 퀼트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공동체 미술작품으로 54톤에 이른다.

퀼트, 흩어진 시간을 모으다

이 작품은 전시 이후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라크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을 추모하는 K.I.A. 메모리얼 퀼트를 비롯해서 911 테러 희생자 추모, 유나이티드 인 메모리, 월드 트레이드 센터 메모리얼 퀼트 등 수많은 추모전의 모티브가 됐다.

‘낯선 일상에게’에서는 애도의 시간이 낳은 퀼트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 퀼트에는 ‘quilt’ 라는 단어의 어원처럼 ‘채워넣는 물건’이, 고인에 대한 추억임을 알 수 있다. 참여자가 퀼트보를 만드는 시간만큼은 혼자만의 시간에 충일하다. 한땀 한땀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퀼트의 매력은 창작의 기쁨을 넘어선다.

퀼트는 어떤 면에서 산산이 조각난 존재와 분열되고 흩어지고 소외된 이야기를 하나하나 묶어주는 시간을 선물한다. 나아가 내면에 숨겨진 심상을 평면 위에 꺼내 보여줌으로써 감정의 배출 효과까지 만들어 낸다. 고인에 대한 애도가 아직 슬픔으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대해, 홍우선 교육사는 이들의 안전을 제일로 신경 쓴다고 했다. 이는 참여자가 힘든 이야기를 꺼내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의 힘이 현실에서 어떻게 발현되었으면 좋을까요? 이번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황귀영 강사에게 물었다. “예술작품 감상을 통해 고통과 삶을 이해하는 작은 단초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래요. 또 창작 활동을 통해 개인의 고유한 감정과 생각을 점검할 수 있기를 바라지요” 강사들의 열의와 강의 노하우가 궁금해서 다시 물었다. 현장에서는 소통과 교감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신지요? “잘 들으려고 합니다” 누군가의 응어리진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큰 힘이 되는 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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