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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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 충청리뷰
  • 승인 2016.07.2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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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발행인
▲ 한덕현 발행인

무슨 거대담론을 얘기하자는 게 아니다. 그저 지금 현재,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면 이런 화두가 저절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사드 배치, 진경준 구속, 나향욱 막말 등이 그렇다.

우선 사드배치 논란을 들여다보자. 성주군민들의 반대시위를 계기로 이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가히 전방위적이라고 할 정도로 드세졌다. 형사 처벌을 공언하며 시위 주동자에 대한 색출에 나섰는가 하면, 언론을 대상으로 괌과 일본의 사드기지 투어(?)까지 진행하고 있다. 굳이 투어라고 표현한 것은 사드의 주체 즉 미국이 손님들의 방문에 맞춰 철저히 준비하고 또 그들이 안내하며 만들어내는 자료에 의거해 보도를 쏟아내는 언론의 입장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런 취지라면 성주군에 대한 사드배치는 필연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게 된다. 처음부터 이렇게 짜여질 수밖에 없는 현실적 한계 때문이다. 이를 지역 현안에 빗대면 무려 20여년이 넘도록 충북과 경북이 공방을 벌이는 문장대온천개발 논란과 똑같다. 충북에선 전 도민이 머리띠를 두르고 환경오염을 부르짖지만 똑같은 사안에 대한 경북쪽의 환경영향평가는 늘 ‘문제가 없다’였다. 사드배치에 무슨 난맥상이 있음을 인정해야 된다면 미국이나 한국정부는 애초부터 괌과 일본투어를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 헷갈리는 것은 사드문제가 졸지에 성주군민들의 전자파 피해여부로만 축소되는 등 여론이 왜곡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초 국민들이 우려한 것은 남북한이 극히 짧은 거리로 대척하는 한반도에서 사드운용의 효용성 문제, 그리고 사드로 인해 한·미·일과 북·중·러로 급격히 재편되는 주변 열강들의 군사력 대치와 확장적 군비경쟁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지난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도발 이후 제기됐던 한반도의 발칸반도화 우려, 즉 주변 열강들의 아귀다툼에 먹이감이 될 수 있다는 현실적 두려움이 더 가시화되고 있는데도 갑자기 언론들은 전자파만 들먹이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전쟁은 정책의 연장(클라우제비츠)’이라는 말이 있다. 최첨단 무기가 한반도에 배치되는 것을 정부가 드러내놓고 홍보를 하고 보수언론들은 현 정권의 결단력을 추켜세우기에 급급하다. 6.25의 상흔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가 인명의 대량살상이 필연적인 전쟁을, 마치 정책이나 정치의 수단쯤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마냥 잠자리가 불편한 요즈음이다. 국민을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정부가 사드배치에 대해 국가주권이라고 강변할 수는 없다. 다 양보하더라도 사드는 우리로선 처절한 양면의 칼날이다. 정부의 대처가 좀 더 솔직하고 당당해졌으면 한다.

진경준과 나향욱 사건이 국민들에게 안기는 배신감과 상실감은 너무 크다. 가뜩이나 냉소가 넘쳐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들 사건은 그야말로 화룡정점이나 다름없다. 권력을 앞세운 그 엄청난 치부행위(진)와, 사람들이 처음 듣는 순간 “그런 말을 정말 했어?”를 되물을 수밖에 없었던, 마치 우주에서나 있을 법한 막말(나)의 수준도 놀랍거니와 그보다는 우리가 늘 소중하게 여기는 국가라는 기제하에서 최고 권력자들이 어떻게 그런 행태를 보일 수 있느냐를 생각하면 그저 아연실색할 뿐이다. 그들의 특권의식과 선민의식, 그리고 그들에겐 어쩔 수 없이 개와 돼지밖에 될 수 없는 국민들의 천민· 패배의식이 요즘처럼 뼈속으로까지 혼재돼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 적도 없다.

국가는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고 형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이를 보장해 주는 건 ‘평등한 자유의 원칙’과 ‘평등한 기회의 원칙’이다. 설령 현실에서의 사회적 불평등으로 ‘차등의 원칙’이 적용된다 하더라도 그건 사회의 최소 수혜자(the least advantaged)에게 이익이 될 때만이 허용된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이클 샌델과 함께 국가 정의론의 쌍벽을 이루는 존 롤즈의 얘기다.

그런데 우리는 국가를 자처하는 세력들에 의해 존엄한 인간은커녕 개, 돼지로 전락했다. 그들이 권력을 등에 업고 수백억원을 착복할 때 우리는 평등한 자유와 평등한 기회조차 원초적으로 박탈당한 채 그들의 기득권에 눌려 하층의 신분으로 살아갈 것을 강요당한 것이다. 이 나라의 지배층들은 서민이라는 최소 수혜자들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고 오히려 이들을 개, 돼지에 불과한 민중으로 치부하며 위세를 부리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원하는 국가가 아니다.

19세기 말 최고로 발흥했다가 지금은 극히 일부 국가 급진주의자들의 호기(豪氣)로서나 만날 수 있는 무정부주의 이른바 아나키즘을 떠올린다. 모든 정치적인 조직과 규율,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오로지 개인의 자유를 최고 가치로 떠받치던 이 사상은 그러나 인간의 선의적 사회성과 자율을 너무 믿은 나머지 무대 뒤로 사라지게 된다. 조직과 제도의 구비 없이는, 인간사회의 효율적 운용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람 두명만 모여도 거기엔 반드시 갈등이 생긴다. 한국 아나키즘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독립운동가 이회영은 독립투쟁이라는 그의 웅대한 꿈을 펼치기도 전에 무정부주의자들이 하찮게 여기려던 조직과 제도의 부재로 끝을 맺는다.

국가라는 것은 바로 이를 보완해 인간의 존엄을 지키라는 것이지 국가가 그 국민을 규제, 기망, 재단하고 심지어 신분제의 하층민으로 묶어 군림하라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런데 요즘 이런 질문이 불쑥불쑥 엄습하는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나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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