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는 청주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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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는 청주의 보물
  • 권영석 기자
  • 승인 2018.03.21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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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으로 찾은 흥덕사지, 이젠 미래가치를 부여할 때”
직지찾기운동본부 설치하고 노력 기울였으나 못 찾아

청주 흥덕사지를 찾기까지에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흥덕사지는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가 있던 절 터이다. 이를 찾는데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직지는 지난 1999년 밀레니엄을 맞아 미국의 한 신문사가 발간한 잡지에 “지난 2000년간 세계를 변혁시킨 가장 위대한 사건이 금속활자의 발명”이라고 나와 있다. 이 잡지는 ‘구텐베르크의 성경‘으로 대변하는 인쇄술의 보편화가 세상을 바꿔놨다고 설명하면서 금속활자의 발명은 ‘한국’ 그리고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활자본은 직지라고 명시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는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상시 진행하고 있다.

세계를 뒤흔든 최고의 사건이지만 아쉽게 직지는 우리나라에 없다. 직지는 상·하권으로 제작되었지만 상권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하권만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소장 중이다. 그래서 1997년엔 청주시민회에서 ‘직지찾기운동본부’를 조직해 상권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청주시민회는 충북참여연대의 전신. 당시 실무자였던 이선영 충북참여연대 사무처장은 “국내 어딘가에 있을 직지 상권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홍보물도 간행하고 직지에 대한 제보도 많았지만 결국 상권은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청주시민회의 직지찾기운동은 현재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이어가고 있다.

하권을 되돌려 받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꾸준히 직지의 반환운동을 벌이고 있다. 반환이 힘들면 영구임대 형식으로도 추진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런 가운데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해 말 프랑스 내에 있는 아프리카 문화재에 대해 반환 의사를 밝혀 직지의 반환여부에도 관심이 쏠려 있다.

 

1973년, 직지의 학술적 가치 인정

직지의 존재가 서구사회에 처음 알려진 건 1900년 프랑스 만국박람회에서다. 당시 조선에서 프랑스공사로 근무했던 꼴랭드 쁠랑시는 박람회장에 한국관을 설치하고 직지를 전시했다. 쁠랑시는 직지를 ‘1377년 만들어진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고 소개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한다.

황정하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실장은 “직지는 1900년 처음 알려졌고 1952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돼 열람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가치를 인정받은 건 1973년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1972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세계도서의 해 특별전’이 있었을 당시도 직지의 학술적 가치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며 당시 특별전의 도록을 보여줬다. 도록에는 특별전에 전시됐던 책들의 간략한 설명과 주목할 책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직지는 한 줄로 짧게 설명돼 있었다. 하지만 전시회 이후 직지의 위상은 바뀌었다.

전시회 이후 프랑스 국영방송은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명가가 아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도 1972년 5월 28일 “구텐베르크보다 75년 앞선 직지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서 발견”이라고 1면에 실었다. 국내에선 직지를 살펴보기 위해 프랑스국립도서관을 방문했다. 이 시기 고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중인 직지 하권의 내용을 사진으로 찍어 국내로 들여왔다고 한다.

황 실장은 “고 박병선 박사 덕에 국내에서 직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학계는 사진을 토대로 직지의 진위를 판단했다. 그리고 전문가 20인이 모여 직지가 금속활자본이라고 최종결론을 내린다. 이후 국내학계는 1973년 직지를 5개국 언어로 번역한 영인본을 만들었다.

1972년 ‘세계도서의 해 특별전 도록’(좌), 고 박병선 박사의 1973년 직지관련 발표문(가운데), 1973년 ‘프랑스동양학회 100주년 기념전시회 도록’ /육성준 기자

 

“이름 모를 묘가 도왔다”

영인본은 당시 규장각과 장서각에 보관되었다. 1973년 청주대 김영진 교수는 영인본 한 권을 입수해 청주 흥덕사 찾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10년. 학계에서는 흥덕사를 찾을 수 없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던 1984년, 운천동택지개발을 하면서 흥덕사의 단초들이 나왔다. 황 실장은 “당시 여러 유물들이 나왔지만 흥덕사라는 것을 입증할 결정적인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결국 공사는 계속되었고 그런 사이 고물상을 통해 굴삭기에 찍힌 금구가 신고됐다“고 기억했다.

금구가 단초가 되어 청주대 박물관 팀은 공사중지명령을 신청했고 문화재청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문화재청에서 충북도, 한국주택공사 그리고 해당하청업체까지 공사중지 공문이 전달되기까지 시일이 소요됐다. 그 사이 하루에 수십톤씩 흙을 퍼내는 공사는 계속됐다. 그러자 당시 현장을 취재하던 옛 충청일보 사진기자와 동사무소 직원은 육탄방어로 공사를 저지했다.

황 실장은 “그들의 노력과 그곳에 있던 이름 모를 묘가 아니었으면 흥덕사지는 찾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공사현장에 소유주를 찾지 못한 묘가 있었다. 시행사는 묘를 이장하지 못해 해당 구역을 제쳐두고 공사를 진행했다. 이후 공사가 중지될 때까지 묘가 있는 구역은 공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그 구역이 현재 흥덕사지터가 있는 곳이다.

천운으로 찾은 흥덕사지에는 이후 고인쇄박물관이 건립되고 금속활자전수교육관, 근현대인쇄전시관이 들어섰다. 그리고 유네스코기록관 청주유치와 함께 운천동도시재생사업으로 도약을 꿈꾸고 있다.

이와 관련해 오영택 청주고인쇄박물관장은 “흥덕사의 보전과 발전은 그동안 지자체와 힘을 합쳐 이뤄냈다”며 “이젠 유네스코에서도 흥덕사에 주목한다. 직지가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치로 거듭날 수 있게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첫 단계로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오는 4월 홈페이지를 개편, 온라인 박물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황정하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실장 /육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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