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콜중독에 묻힌 사건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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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콜중독에 묻힌 사건의 진실
  • 한덕현 기자
  • 승인 2004.11.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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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빰 3대 정도만 때렸을 뿐”

죽은 도광스님은 법주사의 ‘문제아’였다. 그의 알코올 중독 때문이다. 이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도광스님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역시 그가 죽기전 술로 인해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확인됐다. 이 때문에 평소 당뇨 등 지병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타살 의혹에 대해서도 “그가 맞을 짓을 했다”고까지 폄하한다.

렇더라도 은사인 삼성스님의 주장처럼 집단구타를 당했고, 이것이 사망한 원인의 한가지였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삼성스님은 한 진정서에서 “(형인) W스님이 (동생의) 왕생극락을 청하였으나 인과응보는 삼세제불(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도 면하지 못한다”면서 반드시 사실을 규명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도광스님이 사건에 휘말린 빌미는 물론 ‘술’이다.

도광은 지난해 말부터 법주사에서 수행하는 이른바 동안거를 가졌다. 동료 스님에 따르면 이 때만해도 묵언 참선하며 조용하게 지냈으나 올 구정을 기점으로 술을 입에 대기 시작, 분위기를 흐리게 했다는 것. 어느 땐 1주일 내내 술을 접하게 되자 사찰측은 몇차례 훈계하게 됐고, 이런 식의 일상이 여름 수행인 하안거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한 스님의 얘기는 당시의 분위기를 시사한다. “남들은 참선 수행하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언행일체를 조심하며 선방생활을 하고 있는데 대낮부터 술에 취해 사찰내를 활보한다면 정상적인 사람의 시각에서 그냥 넘길 수 있겠나. 도광의 술버릇 때문에 수차례 주의가 가해졌고 어느 땐 징치(懲治) 문제가 논의되기도 했다. 절에서 쫓겨 난 후엔 술을 더 접한 것으로 안다. 그렇지만 죽은 도광은 남한테 해코지 할만한 성격이 못된다. 때문에 그에 대한 구타 및 타살 의혹이 제기되는 것은 안타깝다.”

집단 구타와 뺨 3대의 차이
도광스님은 죽기 전 병원을 찾은 가족에게 “스님 2명과 처사(일반인) 등 다섯명에게 강제로 승복과 승려증을 빼앗기며 폭행을 당했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동료인 K스님에게 전달됐고, K스님은 도광의 사망 후에 법주사로 찾아가 호법국장을 맡고 있는 D스님에게 “승복과 승려증을 왜 빼앗았고 폭행했냐”고 따졌다.

K스님은 이 때 D스님으로부터 “우리는 심하게 안 때렸다. 따귀 3대만 때렸을 뿐이다. 승려증과 승려복을 빼앗은 것은 승려로서 위계질서를 파괴하고 품위를 훼손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

이에 대해 D스님은 “도광이 승려로서 품위를 심각하게 훼손해 종헌종법에 따라 직무상 조치로 승려증과 승려복을 박탈하고 산문출송(절에서 쫓아낸다는 전문용어)시켰다. 이후 두 번째로 병원에 입원하기까지는 전혀 그의 행적을 모른다. 도광이 첫 번째 입원할 때도 그 사실조차 몰랐다. 뺨을 3대 때렸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나에 대한 음해가 제기돼 이미 중앙 종단의 호법부에 사실조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도광의 몸에 있던 멍이나 부검논란도 그렇다. 나는 처음 유족측이 환자의 멍을 문제삼길래 병원과 경찰에 사인을 확실하게 밝히라고 오히려 촉구했다. 나는 시신을 보지 못했지만 당시 담당 의사가 알콜 중독환자는 죽은 뒤에 몸에 시퍼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사찰에서의 구타는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D스님은 또 진정을 제기한 삼성스님에 대해 “조계종으로부터 승적이 박탈됐기 때문에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다. 그 분이 법주사에 기거할 때도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 만약 언론에서 그 쪽 얘기만 듣고 구타 쪽으로 기사를 쓴다면 법적조치를 강구하겠다. 병원에서 사인이 분명하게 확인됐고, 나의 구타 의혹과 관련해서도 보은경찰서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책잡힐 이유가 없다. 사실에 입각한 기사를 쓰라”고 주문했다.

병원 관계자는 잠수?
유족측과 주변인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도광스님은 죽기전 법주사로부터 일종의 추방조치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주사 호법국장인 D스님도 이를 인정한다.

이에 대해 K스님은 “내가 법주사로 올라가 호법국장에게 승복과 승려증을 달라고 한 것은 유류품들을 회수해 망자와 함께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이 때 호법국장은 따귀 3대 정도는 때렸다고 실토했다. 병원 의사도 처음엔 사인에 대해 구타의 흔적은 있어도 당뇨 알코올중독의 증세가 심했기 때문에 꼭 구타로 죽은 것은 아니라는 말을 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도광이 맞은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D스님은 “도광의 술버릇에 대해 여러 스님들이 문제점을 논하는 대중공사가 한 때 거론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구타는 전혀 없었다. 단순히 몸에 생긴 시퍼런 현상 때문에 타살이나 구타를 의심한다는 건 문제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도광스님이 마지막으로 후송됐을 당시 야간 진료를 담당한 곽모원장과 간호사 김모씨는 사건 후 병원을 퇴직했다. 이들의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요구에 병원측은 “우리도 추적이 불가능하다. 경찰 역시 못찾았다고 밝혀 왔다. 원래 있던 번호(휴대폰)로 걸어봐도 이미 바뀌어 버렸다. 의사나 간호사들은 지방병원의 형편상 수시로 바뀐다. 원장도 이 사건 뒤로 이미 두 번이나 교체됐다”며 몇 차례의 종용에도 끝내 주소와 연락처를 모른다고 했다. 나중에 곽원장의 실명을 근거로 추적해 봤지만 역시 확인할 수 없었다. 유족중 사인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한 맏형과 누님에 대해서도 보은경찰서는 연락처를 어딘가에 적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찾지를 못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맏형과 누님은 도광의 사망 당시 시종일관 강력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알려진 것은 부검에 반대한 작은 형(W스님)의 연락처 뿐이다. 그러나 W스님은 기자와의 첫 번째 통화 이후 더 이상의 언급을 피하고 있다.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유족과 병원 관계자들이 ‘완전 잠수한’ 전후 과정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술만 퍼마시니 죽을까 걱정
도광스님이 Y병원에 첫 번째 후송된 것은 2004년 6월 3일 오후 5시 24분 쯤이다. 119 구급차에 의해 법주사 앞의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 2리 O여관에서 실려 왔다. 당시의 정황에 대해 여관 주인은 “전날 본인이 직접 걸어 들어와 투숙했고, 밥은 안 먹고 계속 술만 찾아서 경찰에 신고했는데 119하고 같이 왔다. 술냄새와 딸꾹질이 심했고 얼굴에도 약간의 상처가 있었지만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투숙객에 대해 경찰에 신고할 정도면 본인이 원했거나 혹은 걷지못할 정도의 특별한 상황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여관 주인은 “워낙 많이 술에 취해 있었고 또 계속해서 술을 찾았기 때문에 저러다 죽을까 걱정돼서 신고했다”고 밝혔다. 이날 도광을 직접 후송한 보은소방서 내속리파견소 이모소방사도 “여관방 주변에 술병이 여러 있었고, 당사자가 심하게 취해 있었다”고 기억했다. 당시 출동 일지엔 질병이 급성질환이었고 언어지시에 반응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소방서측은 급성질환은 Y병원의 진단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도광은 바로 다음날 스스로 걸어서 병원을 무단 이탈했다.

두 번째로 후송된 것은 2004년 6월 9일 오후 9시 9분쯤이다. 이번엔 익명의 할머니 제보로 보은읍내 거성아파트 뒤 빈집에서 발견됐다. 당시 후송을 담당한 보은경찰서 모경장은 “운동복 차림이었는데 술에 떡이 되어 있더라. 누워있는 주변에 술병도 여러개 있었다. 술에 취해서 말을 제대로 못했다”고 말했다. 유족들이 도광의 몸 상태를 확인한 것이 바로 두 번째 병원 후송때다. 결국 도광은 이틀후인 6월 11일 밤 9시 16분 사망했다. 병원측이 밝힌 직접 사인은 ‘심정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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