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글>청주, 두 천년 역사속의 문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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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청주, 두 천년 역사속의 문화 <2>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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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호>

송절동에 마한(馬韓)을 묻고
우리는 청동기시대에 다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구리와 주석을 주성분으로 한 청동이라는 비철금속(非鐵金屬)을 쓴 청동기시대는 선사(先史) 모두를 통틀어 문명(文明)의 기운을 가장 짙게 내뿜은 시기다. 더구나 청동기인들은 인류역사에서 처음으로 붙박이다운 토착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역사의 새벽을 가린 어둠이 차츰 걷히기 시작하고, 이내 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를 맞이했다. 처음으로 쇠붙이를 쓰기 시작한 초기철기시대는 기원전 300년 쯤에 시작하여 기원 전․후에 끝났다. 문명에 가속(加速)이 붙어 선사의 마지막인 초기철기시대는 아주 짧게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은 문헌사학에서 말하는 삼한시대(三韓時代)다. 비로소 역사의 새벽이 밝은 것이다. 그 시기를 고고학에서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고도 말한다. 그 무렵의 청주지역은 본디 마한(馬韓)땅이었다. 청주 송절동(松節洞)유적으로 대표되는 많은 움무덤들은 삼한문화의 진수를 고스란히 담았다. 짧은목항아리와 깊은바리 따위의 토기류, 낫과 화살촉, 투겁창, 손칼 등의 철기류, 유리구슬 같은 공예품이 나왔다. 송절동 무덤유적은 과학적인 연대측정에서 서기 50년~400년까지 이르는 시기에 시차를 두고 하나하나 지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삼한시대와 거의 맞아떨어지는 시기의 유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송절동 무덤유적은 바로 북쪽 까치내 건너의 정북동(井北洞)토성과 깊은 관계의 고리를 맺었을 것이다. 연대측정은 물론 출토유물에서도 정북동토성은 원삼국시대 속에 들어가 있다. 그래서 정북동토성은 미호천과 무심천유역의 농경을 바탕으로 한 마한의 강력한 세력집단(勢力集團)이 머문 근거지고, 송절동의 무덤은 그들이 지은 유적이 아닐까. 그 시기의 무덤유적은 송절동 말고도 청주 봉명동(鳳鳴洞)과 화계동(花溪洞),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에도 분포한다.

미호천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청주지역의 마한 세력과 그 뒤의 백제 집단을 뒷받침하는 고대 산업시설 성격의 유적이 있다. 진천 석장리(石帳里)의 제철유적(製鐵遺蹟)과 삼용리(三龍里)의 토기가마자리가 그것이다. 더 서북쪽으로 올라가 충남 천안지역의 몇몇 유적을 끼어 넣으면, 미호천을 한줄로 나란한 마한문화의 축이 뚜렷이 그어진다.

그렇듯 마한의 한 세력은 청주지역에 문화의 뿌리를 내렸다. 청주지역 마한의 역사는 지역사(地域史)라기 보다는 큰 갈래의 한국고대사(韓國古代史)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의 여명(黎明)을 당당하게 열었던 그 세력들은 지금 송절동 야산자락에 묻혔다. 그러나 뒤에 온 백제에게 모든 것을 물려 주었다. 다시 말하면, 백제는 마한의 기층문화(基層文化)를 딛고 일어 섰던 것이다.

난세(亂世) 뒤에 핀 문화의 꽃
그래서 마한은 곧 백제라는 아름아름한 착각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실제 두 문화가 겹친 흔적이 도처에 나타난다. 청주를 놓고 볼 때 정북동 토성, 봉명동의 무덤과 집자리가 그렇다. 백제가 혼자서 지어 남긴 유명한 유적은 청주 신봉동의 무덤떼다. 백제 최대의 움무덤 밀집지역이기도 한 신봉동 유적에는 돌방무덤도 포함되었다. 4~5세기에 걸쳐 지은 그들 무덤에서는 토기류, 무기류, 말갖춤, 농공연모, 각종 장식물이 무더기로 나왔다.

출토유물 가운데 철제무기류와 말갖춤인 마구(馬具)들은 주목을 끈다. 왜냐하면, 막강한 힘과 신분을 상상하는 유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말갖춤과 함께 무덤에서 나온 몇 자루 대형의 세잎새고리자루칼(三葉形環頭大刀)은 상당한 지위를 가졌던 청주지역 최상계층의 전유물(專有物)이었을 것이다. 긴칼을 옆구리에 차고 말에 올라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청주분지를 달리는 백제인의 위풍당당이 보이는 듯 아련히 떠오른다.

청주는 백제의 상당현(上黨縣)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나왔다. 그 내용이 『고려사 高麗史』에 나온다. 청주는 6세기까지 백제의 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5세기에 걸쳐 지은 신봉동 무덤유적 뒤에 나타난 청주 강서 서촌리(西村里)무덤유적 출토유물은 마지막 백제시대를 대강 그렇게 증거하고 있다. 이어 고구려를 치는 길을 열기 위해 청주지역을 오랫동안 넘보았던 신라가 들이닥쳤다. 고구려도 5세기 말에 실제 청주 이웃을 맴돌았다는 사실이 최근 청원군 부강리(芙江里)에서 발굴한 유적과 유물을 통해 제기되어 삼국시대 끄트머리의 청주는 난세(亂世)의 틈바구니에 끼었을 것이다.

어떻든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서기 685년 청주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세웠다. 그리고 청주에 서원소경성(西原小京城)을 쌓았으니, 서기 689년의 일이었다. 그 7세기 후반 무렵에 성을 거느린 고대도시 서원경은 정치도시가 아닌 문화도시로 커나갔다. 학문을 중시하는 문화도시의 흔적은 뒷날 고려초기에 세운 청주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의 새김글 명문(銘文)에 나온다. 신라 말기부터 서원소경 사람들에게 일정한 학문을 가르쳤던 교육기관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명문의 하나 학원경(學院卿)이 그것이다.

신라가 청주를 차지했던 서원소경 때의 유적들이 더러 발굴되고 있다. 명암동과 용암동에서는 신라시대 돌널무덤이 나왔다. 또 백제시대의 널무덤이 빼곡한 신봉동에서도 역시 신라의 돌널무덤이 발굴되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와 비교하면, 빈약하다. 불교유물과 유적도 발굴되어 서원소경의 불교문화를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라사적비(新羅寺蹟碑)가 운천동에서 나왔다. 금속활자로 찍은 책 가운데 세계적으로 연대가 가장 높게 올라가는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의 산실인 운천동 흥덕사(興德寺)도 실은 신라 말기에 세운 절이다. 그 절터 역시 근래에 발굴되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金屬活字本)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위상을 한껏 끌어 올렸다.

   
큰 기록문화유산 두 가지
신라가 청주를 서원소경으로 삼아 얼마만큼 우대하면서 다스렸는 지에 대한 실상은 뚜렷하지 않다. 다만 지난날 백제의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작은 서울' 이라는 이름을 주어 망한 나라의 백성 유민(遺民)들을 달랜 것만큼은 분명하다. 상당산성(上黨山城)에서 나온 기와의 명문 ꡐ사랑부(沙梁部)ꡑ로 미루어 서원소경에 6부(部)가 조직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지배세력은 어디까지나 중앙에서 나온 귀족세력이었을 것이다. 뒷날에는 작다는 말 소(小)자를 빼어 그냥 서원경(西原京)이 되었다. 행정구역은 현(縣) 정도로 오늘의 청주시와 청원군 일부를 포함했을 것이다. 그 서원경을 알리는 데 아주 큰 몫을 하는 기록이 있다. 이른바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다.

오늘날 일본 도다이사(東大寺) 쇼소원(正倉院)이 소장한 『화엄경론 華嚴經論』 두루마리 배접 속에 든 촌락문서는 모두 4가지다. 그 가운데는 서원경이 뚜렷이 나타나는 '서원경×××촌' 문서가 있다. 또 다른 문서인 '사해점촌(沙害漸村)'과 '살하지촌(薩下知村)' 등 나머지 3가지 촌락문서에 나오는 마을들도 서원경 가까운 곳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촌락문서는 통일신라 때 사회·경제·정치 등 여러 분야의 통계수치를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다.

마을의 범위·호구(戶口)·노비(奴婢)·마소의 숫자는 물론 늘고 주는 수치까지 기록되었다. 또 농토의 면적과 뽕나무 따위의 특용작물 재배상황도 적었다. 촌락문서에 나타난 4개 촌의 인구는 모두 422명이다. 그 가운데 남자는 194명, 여자는 248명으로 여자가 많다. 남자들은 군역(軍役)이나 장기노역(長期努役)에 불려 나갔기 때문에 적을 수 밖에 없다. 그렇듯 고대 사회상 연구에 더할 나위 없는 기록이 신라촌락문서인 것이다.

청주에서 나온 기록문화유산 가운데 으뜸은 금속활자로 찍은 『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지금 남은 금속활자본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이 든 그 불서의 끄트머리에는 책을 짓고 펴낸 이들의 이름과 발행시기를 적은 간기(刊記)가 뚜렷하다. 고려 말기에 해당하는 1377년 7월 청주목(淸州牧)교외 흥덕사에서 찍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 흥덕사 자리 바로 아래에는 지금 청주고인쇄박물관이 들어섰다. 세계문명사(世界文明史)에 한 획을 굵게 그었던 흥덕사판(興德寺版)금속활자본은 산라촌락문서처럼 불행하게도 우리네 손을 떠난지 오래다. 지금은 파리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지난 2001년 유네스크 세계기록문화유산에 올라 세계인들의 보물로 남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백제토기같은 사람들
우리는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를 흔히 나말(羅末)․여초(麗初)라고 말한다. 신라의 끝자락과 고려의 첫머리는 별다른 문화의 단절(斷切)없이 그렇게 이어졌다. 신라는 후삼국(後三國)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려에게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려 건국집단은 후삼국이 힘을 겨루었던 쟁패기(爭覇期)에 자신들 말고 다른 세력과 가까웠던 지역은 멀리했다. 서원경 청주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영조 때의 승장 영휴대사(靈休大師)가 쓴 『상당산성고금사적기 上黨山城古今事蹟記』를 보면 궁예(弓裔)나 견훤(甄萱)이 한때 청주를 근거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더구나 건국전야에 궁예의 태봉(泰封)을 도운 '청주인호일천(淸州人戶一千)'은 매우 꺼림칙했을 것이다. 『고려사』는 그 때 이야기를 "청주인은 따르고 거역하는 일 순역(順逆)이 분명치 않다"고 적었다. 그러나 숱한 영웅호걸이 사는 청주를 끝내 외면하지 못했거니와, 왕조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울 때 몇몇 임금은 피난길에 청주에 들러 행궁(行宮)까지 차렸다. 공민왕은 청주에 머물면서 나라의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을 지었다. 오늘날 사직동(社稷洞)은 거기 유래한다.

그러면 고려 건국집단은 애초에 청주를 무슨 까닭으로 멀리했을까. 고대 청주의 북망산(北邙山)이라 해도 좋을 신봉동 야산기슭에 묻힌 백제인과 그 후손들을 우선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들은 오랫동안 백제유민임을 자처하면서, 신라 서원경시대를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았을 터이다. 백제정신은 북방종족(北方種族)에게서 보이는 용맹스러운 기질과 남방풍토(南方風土)의 군자에서 비롯한 변하지 않는 믿음이 서로 결합된 것이라고 한다. 그렇듯, 속내가 깊었다. 누구에게 별로 아첨을 하지 않고 사는 지금의 청주인들에게도 교언영색(巧言令色)은 없다.

오래 보아도 실증을 느끼지 못하는 백제토기같고, 또 마애불(磨崖佛)을 닮은 웃음도 웃을 줄 아는 도량 넓은 사람들인 것이다. 조선시대 여러 사람들이 기질을 말하기를,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 했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로 옮길 수도 있겠으나, 알맹이는 풍월(風月)이다. 풍월은 아름다운 자연을 시나 글로 읊조림과 같은 것이니, 청주인은 풍월을 아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청주시 명암동(明岩洞) 고려시대 무덤에서 나온 단산먹(丹山墨)에서도 묵향(墨香) 그윽한 고장의 전통이 보인다. 오늘날 청주가 문화예술의 도시로 거듭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황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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