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이젠 제 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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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이젠 제 집이에요."
  • 김명기
  • 승인 2005.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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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선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오 7:7~11)

꽃동네사람들이 역설적으로 ‘꽃동네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회로부터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꽃동네로 들어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다 더 적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이 아무리 잘못 하더라도 타인과 타인이 모여사는 꽃동네 보다는 사랑이 더 오갈 것 아니냐는 말이다. 그만큼 우리들은 피의 범주, 혈연(血緣)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

가족이라는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울타리가 무너질 때 그 사회는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가족간에 사랑이 없는데, 내가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이 있을 리는 만무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1970년대 산업화를 겪고 핵가족의 형태로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정형화되면서 정情이라는 이름의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렸다. 핵가족이라는 하나의 틀은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을 앗아가버렸으며 내가 아닌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잠식해 갔으며 남의 이목을 두려워할 줄 아는 수치지심(羞恥之心)을 버리게 했다.

복지제도가 잘 돼 있는 선진국도 우리나라의 대가족제도와 부모를 모시고 사는 효의 도리를 보고 무척 부러워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소중한 자산(資産)을 상실해가고 있다.

   
장계선씨(시몬·62)은 암울한 역사의 뒤안에서 가난이라는 질곡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삶을 살았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것.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느낌과 사랑받는 충만함을 알 수 있는 것.

장씨의 부친은 평범한 농투성이였다. 그러나 그의 기억에 아버지에 대한 형상은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섯 살 때 작고했기 때문이다. 얼핏 그의 기억에 스쳐지나가는 것은 부친이 추운 겨울에 돌아가셨다는 것과 눈을 감지 못하고 작고하셔서 어린 장씨가 부친의 눈을 감겨준 것이 전부다.

아버지는 처가살이를 했었다. 논과 밭, 그리고 집을 주었는데, 어버지에게 살 길을 열어준 외가는 그러나 장씨의 친외가가 아니였다. 장씨는 후처 소생이었다. 본처 소생으로 누님이 한 명 있었고 배가 같은 누나 둘과 여동생 둘이 있었다.

“6.25 나고 이듬해 봄이었어요. 친구와 산에 나무하러 갔는데 M1총알과 수류탄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그땐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지도 못했고 놀이감 없는 당시엔 그런 게 제일로 치는 장난감이었지요. 같이 간 친구가 총알 8발과 수류탄 1발을 주웠어요.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것들이 불발탄이었다는 것이었죠. 그것도 모르고 친구에게 수류탄을 제게 달라고 했죠. 그 친구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고리(안전핀)만 달라고 했는데 그 친구 자기가 고리를 갖고 수류탄은 제게 준다하더군요. 그러면서 수류탄에서 고리를 뺐어요.”

순간 고막을 찢는 굉음이 울렸다. 주위에 황토먼지가 뿌옇게 퍼졌고 섬광이 번쩍 이는 듯도 싶었다. 수류탄이 터진 것이었다. 안전핀을 뽑은 친구의 몸이 갈갈이 찢겨졌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장씨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다리가 끊어지듯이 아파왔다. 흰 바지에 붉은 선혈이 뭉쿨뭉쿨 솟아 올랐다.

폭음을 듣고 동네사람들이 몰려왔다. 한 아주머니가 장씨의 꼴을 보더니 “아이구, 계선이 죽네, 죽어”라고 말했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어른들이 다리를 다친 그를 지게에 실었다. 죽은 것인지 살아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가물가물해지던 의식의 끈도 놓고 그는 출렁출렁 지게에 실려갔다.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육군병원이었어요. 다친 다리가 심하게 곪기 시작했어요. 곪은 상처를 째고 뻥 뚫린 구멍에 심지를 해 박고 치료를 하는데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결국 솜에 마취약을 묻혀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그렇게 수술을 했지요. 지금도 그때의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허벅지에 박힌 파편을 제거하고 장씨는 석달 후 퇴원했다. 집으로 돌아와보니 집안이 엉망이었다. 나물 뜯으러 간다고 나갔다던 어머니는 그 뒤로 소식이 없었다고 했다. 병원생활 할 때 나물 뜯어 먹고 싶은 것 사주고 입원비도 마련해주던 누나들도 행방불명 상태였다. 도대체 가족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와 언니를 잃고 길거리에서 울고 있던 여동생 둘도 누군가가 데려갔다고 마을사람들은 그에게 말해주었다.

아버지는 친척도 없는 고아였다. 데릴사위로 처가에 들어와 살던 처지였으므로 어린 장씨는 어디 가서 누구를 찾을지 알 길이 막막했다. 어머니의 친정, 그러니까 장씨는 그의 외가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어떻게 살지 막막했다. 그때 선모(先母)의 친정집에서 외삼촌이 장씨를 맡겠다고 나섰다. 그는 장씨를 데려가 초등학교까지 가르쳤다. 그리고 외삼촌이 말했다.

“중학교는 안 되니 남의 집 소라도 키워라.”

초등학교를 졸업한 장씨는 남의 집에 들어가 소를 키우고 땔나무를 하며 1년을 지냈다. 그런 장씨가 안쓰러웠는지 선모의 딸인 이복 누나가 장씨를 맡겠다고 나섰다.

“올라와라. 내가 학교 가르친다.”

그러나 이복누나의 집에 올라가보니 사정이 그 곳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더구나 매형은 화상으로 인해 조막손인 사람이었다. 그 집도 제 식구 입에 풀칠하기 바쁜 처지였다. 결국 장씨는 그곳을 나와 4년 동안 남의집살이를 했다. 그는 그 곳을 나와 식당 종업원,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을 전전했다. 그리고 열 아홉에 삼척 도계로 가서 저탄장에 석탄을 퍼나르는 일을 했다.

“그 곳에서 스무살 때 광산에 취직하게 됐지요. 그때 일당으로 받는 것이 쌀 한 되에 보리쌀 한 되였어요. 쌀 한 되는 하숙비로 주고 보리쌀 한 되는 팔아 생활비로 썼지요. 그러던 것이 월급이 올라가고 돈도 모을 수 있게 되었어요. 저는 제멋대로 컸어요. 부모 사랑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고, 가족들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 했죠. 세상에 나는 혼자라는 그런 생각으로 늘 가슴 한 켠이 비어 있었죠. 그러니 느는 것이 술이었죠. 엄청나게 많은 술을 먹었어요. 있던 돈 다 쓰고 나중에는 버는 족족 술로 날렸지요. 밥값 빼면 모두 술값이었으니까요. 술집도 좋은 데로 찾아다니니 돈이 감당 안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모아놓은 돈 다 쓰면 그때서야 일을 하고, 일을 해서 돈이 조금 모였다 싶으면 또 술집에 모두 쏟아놓고…… 늘 그런 생활이었어요. 이웃사람들이 그런 제가 너무 딱했던 모양이죠. 중매를 서더군요. 스물여덟에 결혼이란 걸 해보았어요. 바깥에서 샌 쪽박이 집에서 안 새겠어요? 허구헌날 술타령에 폭력까지 휘두르는 남편이 뭐 좋다고 살겠어요. 여덟 달만에 도망가더군요.”

서른다섯에 그는 광산일을 그만두고 울산으로 내려가 조적공으로 일했다. 조적공 일당은 꽤 높은 편이었다. 많은 돈이 모아졌다. 그러나 그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8년간 일하면서 예금했던 돈, 그 돈으로 그는 다시 술을 사먹었다. 게다가 이제는 노름까지 손을 대게 됐다. 속칭 ‘도리짓고땡’이라는 것에 그는 빠져들었다. 아무리 많은 돈도 하루아침에 모래알 빠져 나가듯 허망하게 없어져버리고 마는 것이 노름판이었다. 하루에 쌀 열 가마 값 잃는 것도 이젠 예삿일이 돼버렸다.

“그렇게 살았어요. 하고 싶은 것 있으면 아무 생각없이 하고, 하기 싫은 일 있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를 않았지요. 그러니 규모있는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겁니다. 어려서부터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저에게는 없었어요. 늘 혼자라는 생각, 나를 생각해주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던 겁니다. 그러니 늘 막 살았죠. 아무렇게나 살다 가면 그뿐이라는 생각이었지요.”

행방불명이 되었던 어머니, 그 어머니를 그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만남이 오히려 그의 삶에는 해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어머니를 만나고부터 곁길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로부터 얻은 배신감, 억누를 수 없는 분노로 그는 막 인생을 살았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생각은 지금도 단호하다.

“그 여자, 용서할 수 없습니다.”

병원생활 후 풍비박산이 돼버린 집안……
집안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어머니 탓이 컸었다. 그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세월이 지나다보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었던 가족들의 뒷이야기를 조금씩 알게 되더군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던 동생 가운데 큰 녀석은 강원도 옥계라는 곳에서 남의집 식모살이를 하다 그 집에 시집을 가서 아들 다섯에 딸 하나를 낳고 고생고생하며 살더군요. 같이 나간 동생은 다른 사람이 데려갔는데, 집 나간 이듬해 죽었다고 하더군요. 큰누나는 산골로 시집가서 죽을 고생으로 일만 하다 골병들어 죽고, 둘째누나는 안양 인근에서 남의 첩살이를 하고 있다고 하구요. 나중엔 어머니 소식을 듣게 됐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행방불명이 됐던 것이 아니라 어린 자식들을 팽개치고 도망을 갔던 것이었어요. 나물 뜯으러 간다고 나가서 한 영감탱이와 눈이 맞아 바람이 난 거였죠. 강원도 정선에서 어떤 영감탱이와 잘 살고 있는 어머니를 보는 순간 눈이 뒤집히더군요. 일을 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죠. 속으로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 넌 너대로 살고, 난 나대로 산다. 정을 주지 않았으니 나도 정을 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정을 받지 못했으니 당신도 내 정을 받지는 못한다. 그렇게 남남이라는 생각만 키워서 돌아오게 됐던 거죠.”

세월이 흘렀다. 암울했던 젊은 시절, 그러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음으로 헛되게 살아도 헛되게 살아가는지 몰랐던 그 시절은 강물처럼 흘러갔고 어느덧 장씨의 머리에도 하얗게 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1992년 12월, 그는 꽃동네를 우연히 알게 된다.

“제재소에 있었어요.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 놓았는데 오웅진 신부님이 나오셔서 말씀을 하고 계시더군요. 꽃동네가족이 4000명에 이른다는 말을 듣고, 저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면 그곳에 가서 내 월급 조금 받고 생활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꽃동네를 한 번 찾아와봤어요. 그런데 정작 와서 보니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더군요. 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꽃동네가 다시 머릿 속에 떠오르는 거예요. 오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그래서 이듬해 1월 5일 꽃동네를 다시 찾았어요. 그리고 평화의집으로 들어갔죠. 그 겨울에 저는 나무를 하면서 보냈어요. 일을 하는 것은 좋은데 잠자리 때문에 여간 곤욕이 아니었죠. 한 방에 마흔 명이 잠을 자는데 코 고는 사람에, 기침하는 사람, 씻지 않아서 냄새 나는 사람…… 도무지 있지를 못 하겠어요. 그래서 다시 나왔어요.”

장씨는 꽃동네를 나와 원주로 갔다. 제재소 일을 하면서 늘 그 타령이 시작됐다. 돈 모이면 술 사먹고, 노름하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사는 게 아닌데 하면서도 자꾸 그런 생활에 빠져들었다. 다시 꽃동네 생각이 났다. 그러나 체면이 서질 않았다. 떠날 때는 자신있게 떠났지만 그 타령의 생활에 젖어들어 다시 꽃동네에 얼굴을 들고 들어간다는 것이 영 겸연쩍은 일이었다.

“늙어 죽을 때까지 내가 살 곳은 꽃동네다 싶었어요. 내가 길거리에서 얼어 죽으면 어떤 놈이 묻어주겠는가. 꽃동네는 먹을 것 입을 것 다 주고 병나면 고쳐주고 죽으면 묻어 준다는데, 왜 그 곳을 떠나왔는가 후회 되더군요. 그리고 저도 이젠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났어요. 그래 이 번에 들어가면 그 곳에 뼈를 묻고 살자. 그렇게 결심했죠. 그래도 염치는 있어서 음성꽃동네로 들어오지 못하고 가평에 있는 꽃동네를 찾아갔죠.”

1996년 3월 14일 그는 다시 꽃동네에 들어왔다. 가평꽃동네를 찾아갔는데 공교롭게도 입소실에 있는 수사가 아는 분이었다. 수사가 웃으며 말했다.

“언제 또 나가시려고 찾아 왔어요?”

“아이구, 그런 소리 마세요. 여기가 이젠 제 집이요.”

   
꽃동네에 들어온 장씨는 열심히 일했다. 음성꽃동네 뒤편에 있는 승주골에 가서 2년 동안 농사도 짓고, 평화의집으로 들어와서도 농사를 지었다. 500평이 넘는 텃밭을 그는 혼자서 맡아 관리하고 있다. 콩, 깨, 옥수수, 고추 등속을 지어 알차게 여문 곡식들을 꽃동네가족들이 먹는 모습을 보면 여름내내 고단했던 마음이 한 순간에 가시곤 한다.

지난 해에는 참외와 수박, 토마토를 심어 가족들의 입을 즐겁게 해 주었다. 꽃동네에 있는 작은 동물원 일도 그의 차지다. 우리 안에는 오리와 닭, 너구리 등이 살고 있다. 그 놈들을 보노라면 세상일을 잊을 정도로 재미가 있다. 그는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이젠 끊어버렸다. 얼마 전에는 담배까지 끊었다. 그러고 나니까 마음 속이 그렇게 맑아질 수가 없다고 한다.

그는 꽃동네시설에서 보호받고 있는 가족이라기보다는 봉사자에 가깝다. 꽃동네 농사를 도맡아 하고 있고 가족들 챙겨주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늘 꼼지락거리면서 일을 한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좀이 쑤셔 죽겠다고 한다. 일 없이 쉬고 있으면 몸에 병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일이 없는 겨울이 싫다. 봄이 돌아와야 열심히 땀을 흘리면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에 파묻혀 지낼 수 있는 여름을 그는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늘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난 천상 일복을 타고 난 놈이니 일 없으면 안 되죠. 전 그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제가 일을 하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와 같은 것이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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