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에 끌려가 전범으로 몰려 숨져’
상태바
‘전쟁터에 끌려가 전범으로 몰려 숨져’
  • 홍강희 기자
  • 승인 2005.01.2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변광수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충북지부장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밝혀내기’ 37년

   
변광수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충북지부장(64)은 일제에 철저히 당했다. 그는 광복 후 머나먼 타국에서 ‘전쟁범죄자(이하 전범)’로 몰려 아까운 목숨을 잃은 아버지의 죽음을 밝혀내는데 37년을 바쳤다. 그러나 지금도 완벽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동안 혼자서 일본을 오가며 애를 썼다면 이제는 정부가 나서 진상규명을 시작했을 뿐이다. 지난 68년 일본 민간단체의 주선으로 일본에서 열렸던 한국인 전범 희생자 위령제에 참가한 이래 역사 밝혀내기에 고군분투해온 그는 93년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충북지부’를 조직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에대한생활안정지원법안’이 국회 상임위에 계류중이어서 아직 보상을 논할 단계는 아니지만, 피해자 진상규명을 위한 발걸음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그는 환영한다고 말했다. “피해진상규명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는 것을 보고 늦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정부에서 진작에 했어야 할 일인데 이제라도 시작을 했으니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살았는데 이제는 동아밧줄을 얻은 느낌이다.”

타국에 묻힌 아버지
변광수 지부장은 아버지 변종윤씨를 억울하게 잃었다. 1942년 1월 고향인 청원군 내수읍 비상리에서 내수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글학습당이라는 야학에서 강사를 하던 청년 변종윤(당시 22세)은 일본육군 군속의 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강제로 차출됐다. 일본 관리들은 당시 면 단위에서 1명씩 선정했으나 초등학교도 졸업하고 야학 강사를 하던 변씨가 눈에 띄었던 것.

20대의 팔팔한 청년들을 감언이설로 속인 일제는 이들을 2개월간 부산에서 교육을 시킨 뒤 싱가폴, 태국, 인도네시아 등 적도지역의 연합군포로수용소로 보냈다. 변씨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근무했다. 그러다 그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면서 포로학대죄로 법정에 서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변 지부장의 말이다. “일본관리들은 당시 한국과 대만에서 3000명의 젊은이를 포로감시원으로 데려갔는데 계약기간이 2년이었다. 그들은 전쟁 수행을 위해 포로들에게 비행장, 항만, 철도공사를 하도록 지시했고 포로감시원들에게는 이를 감독하는 업무가 맡겨졌다. 그러나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포로들이 역으로 포로감시원들을 감시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3000명 중 현장에서 죽은 사람도 많고, 148명은 유기·무기형을 받았고, 23명은 사형됐다. 아버지도 감옥생활을 하다 재판을 받았으나 조원 10명 중 조장이었다는 이유로 구로도크형무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말았다. 그 때가 47년 9월 5일이었다.”

그러나 B급(사형당한 사람)·C급(유기·무기형을 받은 사람) 전범들의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변론의 여지조차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변 지부장은 후에 인도네시아 법정에서 진행된 재판기록을 입수, 이를 확인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조원들과 둘러앉아 찍은 사진까지도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했다. 그는 “아버지가 조장만 아니었어도 살 수 있었는데… 누가 자의로 포로들을 학대했겠는가. 일제 식민지하에 살던 조선인들은 일본관리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며 분개했다.

26회에 걸쳐 일본 정부와 재판
아버지 변씨가 포로감시원으로 차출됐을 때 변 지부장의 나이는 1살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형제, 자매도 없다. ‘아버지’ 소리 한 번 해보지 못한 그는 친구들이 ‘아버지’라고 부를 때 무척 부러웠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니 가족들의 생활은 어떠했겠는가.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가 약간의 땅을 부치며 근근히 살았으나 집안에 아버지가 안계시면 어떤가를 뼈저리게 체험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명절에 동네사람들이 세배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대문에 ‘와병중’이라고 써붙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어린시절이 얼마나 기막혔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부분이다.

따라서 그는 집안의 ‘희망’으로 자랐다.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농사를 지어 그를 충북대 축산과에 입학시키고 만다. 지난 86년 70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어머니는 후에 ‘변선생 어머니’라는 호칭을 들으며 젊은시절의 고생을 스스로 위로받았다는 것. 변 지부장은 33년간 교사생활을 하다 지난 2000년 정년퇴직했다. 그의 인생은 교사로 살아온 것과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기 위한 노력으로 요약된다. 교사생활하면서 번 돈의 많은 부분이 일제에 의한 피해를 진상규명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고, 그의 집은 그가 주도해서 만든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충북지부 사무실이 돼버렸다. 회원은 현재 300명 되지만, 당시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사람들의 생활이 뻔해 대부분의 경비를 변 지부장이 내고 있어 사무실 한 칸도 마련하지 못했다.

그는 태평양전쟁 희생자로 일본에 눌러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인 동진회 관계자들과 함께 일본정부를 상대로 26회에 걸쳐 ‘한국·조선인 B·C급 전범자의 국가보상 등 청구사건’을 진행했다. 지난 96년 시작된 재판은 99년 동경 최고재판소에서 기각 판결을 받은 것으로 끝이 났다. 변 지부장은 “재판부는 65년 한일협정에 따라 양국간의 보상의무는 종결됐고, 외국 국적자에 대한 보상은 근거법이 없으니 입법해서 보상하라는 주문을 달았다. 변호인단은 4000만원을 보상 요구했으나 보상법이 현재 일본 국회에 계류중”이라고 말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우리나라 외교통상부를 상대로 한일협정 문안에 대한 내용을 질의했으나 “우리 정부가 직접 관여할 사안이 아니다”는 무성의한 답변을 듣고 말았다.

“억울한 사람 없이 제대로 진상규명돼야”
아버지에 관계된 것이라면 물, 불 안가리고 덤벼든 변 지부장은 마침내 한국대표로 인도네시아에 가서 아버지 유골을 찾아오고 말았다. 동진회 회원들과 함께 관계 요로에 진정한 결과 83년 넘겨받아 내수 선산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병사한 것으로 기재됐던 호적도 일본 후생성으로부터 사망증명서를 발급 받아 정정했다. 과거사청산을 온 몸으로 보여준 변 지부장은 그러나 남들이 아버지를 친일파라고 부를 때는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일제가 포로감시원을 차출하면서 겉으로는 지원제라고 속여 주변에서는 자원해서 포로감시원이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충북도가 구성하는 실무위원회에 유족 대표로 참여, 일제강점하에 강제동원돼 숱한 피해를 입은 유족들의 진상조사에 관여하게 된다. 하지만 단순한 보상뿐 아니라 죽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제와 위령탑, 자료전시관 조성까지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한일협정의 내용도 제대로 됐는지 문제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료가 없어 강제동원을 입증할 수 없는 유족들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은 교직생활을 해서 그나마 백방으로 쫓아다니며 자료를 찾아 모았지만, 연로하고 시골에 사는 다른 유족들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

어쨌든 변 지부장은 그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법률’이 제정되는데 크게 일조했다. 본인은 ‘자식이니까 이렇게 한다’고 말했지만, 이처럼 발벗고 뛴 유족이 없었다면 관련법이 제정됐을까. 숱하게 일본을 드나들며 재판을 벌이고, 우리나라 정부를 상대로 과거사 진상규명을 요구해온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제하 역사’도 밝혀지게 된 것이다. 그럼 앞으로 그가 계획하고 있는 일은 또 무엇일까. “이왕 법이 제정된 만큼 제대로, 억울한 사람 없이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하고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충북지부 사무실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래야 피해자들끼리 만나 모임도 하고 위로도 받을 것 아닌가.”

변 지부장은 오는 2월 1일부터 더 바쁘게 됐지만 그래도 마음 한 편으로는 기쁘다. 정부가 과거사청산이라는 ‘칼’을 빼들었으므로. 이제 그 칼을 어떻게 쓰느냐를 지켜볼 때가 된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