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보니까 비로소 없는 사람들을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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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보니까 비로소 없는 사람들을 이해”
  • 한덕현 기자
  • 승인 2005.04.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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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이 사회복지가로 변한 사연
청주자활후견기관 한관동실장의 인생유전
   
한관동씨(54)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은행원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상호조차 생소하지만 과거 충북은행이 잘 나가던 시절, 그는 본·지점을 다 거치며 요직을 두루 맡을 정도로 그야말로 준비된 뱅커였다. 1977년부터 1996년까지 한 은행에서만 20년의 성상을 쌓았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 이미지로 각인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를 만난 곳은 전혀 뜻밖의 장소였다.

재단법인 청주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 청주자활후견기관이 그의 일터다. 여기서 실장이라는 직함을 맡고 있다. 사무실이 있는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 큰 대머리는 한실장에게 여러 의미를 안긴다. 본인 성씨의 본향인데다 조상 대대로 살아 온 텃밭이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남부럽지 않은 재산 즉 땅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시절의 삶은 풍족했다. 거기다가 안전한 직장까지 가졌으니 이보다 더한 ‘정상(正常)’은 없었다.

청주자활후견기관은 말 그대로 의지할 데 없는 저소득층의 자활을 돕는 사회복지 기관이다. 현재 각 자치단체마다 대부분 설립돼 운영되고 있으며 이곳은 지난 2000년 충북에서 가장 먼저 생겼다. 때문에 한관동실장이 이곳에서 봉사활동의 선봉에 선다는 것은 넉넉한 사람의 베품 정도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한실장의 처지는 가까운 지인들조차 고개를 내저을 정도로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처음 한실장을 취재원으로 소개받은 계기도 “사람의 삶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냐”는 지인들의 놀라움이었다. 이른바 요즘 각종 언론이 즐겨 편집하는 ‘이런 인생’ 내지 ‘저런 인생’의 소재로 적격이라는 성화성 주문이 취재의 발단이 됐다.

본인은 모든 것이 숙명이고, 지금 하는 일은 오래전부터 꿈꿔 온 것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기자의 요구에 마지못해 전해진 얘기들은 결코 예사롭지가 않았다. 한실장은 비록 갑부는 아니지만 대단한 재산가였다.

물려 받은 재산에다 본인의 심벌마크인 성실함이 가져 다 준 결과물이었다. 때문에 청주의 다운타운인 상당구 용암동이 막 개발될 당시 이곳에 7층짜리 건물까지 올렸던 것. 지금의 청주불교방송 옆 건물이다. 자연히 친구들 사이에선 부러움의 대상이 됐고, 상대를 배려하는 따뜻함이 몸에 밴 체질 때문에 그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빈손이 됐다.

평소 씀씀이가 깔끔하기로 소문난 그였기에 사람들한테 결코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 돈 얘기는 제발 하지 말라는 몇 차례의 손사래 끝에 간신히 얻어 들은 갑작스런 추락의 원인은 너무 간단했다. 사업하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 줬다가 받지 못한 게 결정타였다. 워낙 큰 돈을 떼이는 바람에 건물도 날리고, 땅도 날리고 이렇게 연쇄반응(?)으로 다 잃었다는 것. 지금 그는 가족과 함께 월세집에서 산다.

그러나 한실장은 지금의 처지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의 은총쯤으로 여기고 싶다는 것이다. “막상 내가 없어 보니까 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알 것 같다. 그들의 진심을 똑바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충주 농아학교 수녀님한테 들은 얘기중에 이런 것이 있다. 한번은 원장수녀님이 귀가 아파 아이들한테 병원에 다녀 와야겠다고 말하니까 이곳 애들이 ‘원장선생님 병원에 가지 마세요’라고 말렸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묻으니 치료를 안 하면 귀가 안들릴테니까 자기들하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요지였다고 한다. 나 역시 이런 아이들의 심정으로 지금의 일을 하고 있다. 가난은 이해가 아니라 체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산을 잃었기 때문에 오히려 나의 삶을 찾았다고 여긴다.”

한실장은 어려서부터 지금의 일을 생각했다고 한다. 철저하고 완고하면서도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던 부모님의 영향이 컸고 본인 스스로도 언젠가는 남을 돕겠다고 늘 의식해 왔다. 은행에 입사할 때도 부모님이 살아 계실 동안만 다니겠다고 약속했다는 것. 실제로 이 약속은 지켜졌고 직장을 그만 둔 후로는 천주교 신앙생활에 정진할 수 있었다. 그 전에도 오랫동안 천주교를 접하며 불우이웃돕기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던 것. 특히 청주 신봉동의 충북재활원에 후원하러 갔다가 이곳 수녀님들에게 감화돼 사회복지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됐다.

지난 94년 청주 용암동 성당을 지을 땐 평신도회장을 맡아 매일 이곳으로 출근하며 2년간 봉사활동을 폈다. 1남 1년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본받아 딸은 현재 용암동성당 청년회장을 맡아 각종 선행을 실천하고 있다.

한실장이 일하는 청주자활후견기관은 현재 복지환경사업단, 환경미화용역사업단, 집수리사업단, 자원재활용사업단, 식당사업단 등을 운영해 120여명 저소득층의 생계와 자활의지를 책임지고 있다. 이들 사업단이 활성화되면 독립시켜 자체적으로 업체를 운영케 하는데, 환경미화용역사업단의 ‘삶과 환경’이 대표적이다.

청주시가 시행하는 플라스틱 용기 음식물수거 대행업체로 선정된 것이다. 집수리사업단도 ‘하나건축’이라는 상호로 독립했고, 지난 3월 23일 개업한 식당사업단 역시 독립 창업에 대비해 수익금을 적립중이다. 이밖에 사무실 건물 1층에 재활용의류를 기증받아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1000~2000원 선에서 품질좋은 옷들을 다양하게 구입할 수 있다. 간혹 새옷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단골도 생겼다.

자신보다는 이곳 청주자활후견기관 관장님(최정묵신부)이나 기관 자체를 취재해 달라고 수차례 주문하던 한실장은 “신앙생활을 하다보니까 나같은 사람은 얘기의 축에도 못 낀다. 훌륭한 분들이 너무 많다. 지금까지도 남을 돕는다고 했는데 지나고보니까 여전히 형식적인 것같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청주상고와 청주대 경영학과를 나온 한실장은 지금의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기 위해 지난 2003년엔 현도사회복지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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