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사 문수암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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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사 문수암 가는 길
  • 충북인뉴스
  • 승인 2006.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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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소리가 한껏 드높아졌다. 한동안 매미가 허물 벗는 과정에 푹 빠졌던 적이 있었다. 밤마다 허물 벗는 매미를 보러 나무 밑으로 갔다. 꾸물꾸물 힘겹게 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까스로 나무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허물을 벗어내고는 이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던 매미. 허물 벗은 연둣빛 연한 속살이 거친 땅바닥에 닿았을 때 매미는 얼마나 쓰라렸을까.

   
▲ 천변 도량 반야사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백화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720년(성덕왕 19) 의상(義湘)의 제자인 상원(相願)이 창건했다고 한다. 1325년(충숙왕 12)에 중건했으며, 1464년(세조 10)에 왕의 허락을 받아 크게 중창한 뒤 세조가 대웅전에 참배했다. 이때 문수동자가 세조를 절 뒤쪽 계곡인 망경대(望景臺) 영천(靈泉)으로 인도해 목욕할 것을 권했고, 황홀한 기분으로 돌아온 세조가 어필(御筆)을 하사했는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요사채 등이 있으며, 대웅전 안에는 탱화(幀畵) 6점이 봉안되어 있다. 이밖에 3층석탑·부도·목사자·청기와·법고·범종 등이 남아 있다.
우리네 인생에서도 그렇게 수렁으로 곤두박질치는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때로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후회도 하고 한탄도 한다. 예기치 않은 실패에 황당하기만 할 때도 있다.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에 있는 반야사를 갈 때마다 나는 스스로 우매한 중생이 되어버린다. 성큼성큼 걷는 길에서 황당하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처럼, ‘또 뭐가 잘못됐지?’하면서 다시 자신을 돌아본다. 물론 대개 금방은 잘 보이지 않는다. 흙먼지를 잘 가라앉히고 나서도 보일 듯 말 듯하다. 하지만 개울가 절 마당에 가만히 앉아서 우매하면 우매한대로의 나를 한참 동안 비춰보곤 했었다.

   
▲ 반야사 삼층석탑과 대웅전 삼층석탑, 보물 제 1371호. 이 석탑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초층탑신의 결구수법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기단면석과 초층탑신을 꼽도록 하면에 홈을 판 점은 충청도와 전라도 일원에 건립된 백제계 석탑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올 여름 우매리 반야사 계곡은 피서객들로 벅적거린다. 친절하게도 일주문 안 깊숙이 절 앞마당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놓으니, 숲 계곡에서 더위를 피하던 가족들이 그 차림 그대로 절 마당을 한 바퀴씩 돌아보고 있다.

오래된 절답게 나무들도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 그늘에서 매미가 또 운다. 청주 매미는 ‘씨이 씨이 어쩔래? 어떡할래?’ 하면서 내 머릿속을 쪼아대더니, 반야사 매미는 좀 다르게 운다. ‘쉬어, 쉬어, 쉬어 가.’
쉬어가라고 붙잡는 것은 매미만이 아니다. 뙤약볕 내리쬐는 절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매미 밑 나무그늘 들마루의 몇몇 어르신들이 그늘에서 쉬다 가라신다. 팔뚝에 문화해설사란 노란 팻말을 차고 계시다. 황간면 노인회에서 나오셨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지치고 힘들 땐,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인가. 몇 년 전 반야사를 처음 왔을 때도 나는 ‘작은 것’에서 놀랬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높기만 한 산세에다 시원한 계곡, 잘 생긴 바위들을 가진 풍광을 가진 절치고는 규모가 작았다. 대웅전도 작았고, 보물이라는 석탑도 작았다. 그리고 절에 딸린 암자도 작았다. 그러나 신라 시대의 절로 속리산 법주사보다 더 먼저 지었다는 역사적 자부심 또한 은근히 내비치는 절이었다.

   
▲ 반야사 입구의 소박한 부도비.
그 때는 찾아오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가끔씩 올 때마다 사람들의 그림자가 점점 많아지더니 점점 절의 규모도 커져갔다. 첫째로 문수암이 달라졌다. 천길 절벽 위에 작은 판잣집처럼 가까스로 올라앉았던 암자가 어느덧 단아한 별당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더니 오늘은 요사채 쪽이 또 달라져 있다. 사계절 다람쥐 길로 쓰이는 얕으막한 돌담 너머에 붉은 벽돌 창 넓은 양옥집이 관광지 팬션 처럼 한 채 더 생겨나 있다.

두어 번 뵌 적이 있는 스님에게 차 한 잔 얻어 마시려는 마음을 접고 숲길로 향한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세상이 두려울 땐 높은 곳으로 한번 올라보라고. 높다란 암벽위의 문수암으로 쉬지 않고 발걸음을 옮긴다. 돌이 많은 산이라서 그런지 숲길도 울퉁불퉁하다. 남보란 듯 잘난 척만 하면서 정신없이 걸었던 이제까지의 내 발걸음도 이토록 불안불안 울퉁불퉁 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넘어졌다. 넘어지니 땅바닥이었다. 뒤따라오던 불안이 이제 온 몸을 에워싼다. 짙은 숲길만큼이나 불안도 깊다.

더위에 지치고 삶에 지친 발걸음 옆으로 뭔가 기다랗게 휙 스쳐 지나려다 딱 멈춘다. 도마뱀인가? 내가 놀랐듯 그도 놀랐나? 아무 기척이 없다. 야생의 숲에 들어섰을 땐, 그저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 보고 싶은 게 있다고 성급하게 불러내서도 안 된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내 준다.
그러나 오늘은 일부러 기척을 내어 내 갈 길을 간다고 신호를 낸다. 갑작스런 이방인의 출현에 놀라 두려움에 몸이 경직되어있을 그 생명에게는 내가 한시라도 빨리 지나가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다.

숲길을 벗어나니 시원한 영천이 나타난다. 진초록 산빛을 배경으로 빨간 꽃이 싱싱하다. 빨간색 조끼를 입고 탐방객들에게 열심히 문화 해설을 하고 있는 어르신이시다. 시원한 영천에 발만 담그고 돌아갈 것만 같은 피서객들에게, 여기까지만 와보면 반야사의 절반밖에 못 보는 거라며 경사 급한 계단쪽으로 계속 손짓을 하신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배어난다. 사진 한 장 찍어드릴까요? 하니까, 열다섯 소년처럼 한껏 포즈를 취하신다. 이제까지 만났던 반야사 풍경 중에서 제일 좋다.

   
▲ 문수보살을 모신 문수암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는 보살과스님.
문수암으로 오르는 급경사 길은 계단으로 정비되어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길을 오르려면 나뭇가지가 어깨를 붙잡고, 덩굴 식물들이 발길을 부여잡았었다. 그렇다고 지금 길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오를 때 편한 계단 길은 내려 올 때는 무릎이 아픈 것을......

날이 너무 더워서인가. 산새 한 마리 움직이지 않는 숲은 고요하다. 산 생긴 대로 길을 잡아가는 저 아래 물길도 조용하다. 망경대 가는 길에서 내려다보이는 물길은 항아리 모양 같다. 잔잔한 정적 속에서 급한 숨소리를 고르며 조금 올라가니 독경 소리가 울려온다. 저 독경 소리는 산 밑 세계로 흐르지 않고, 하늘로 오르는 모양이다. 문수암이 어느새 비스듬히 내려다보인다.
완만한 비탈길을 몇 발짝 내려가니 바위를 주춧돌로 삼은 문수암이 위태롭게 앉아있다. 나뭇가지 끝 매미허물처럼 그렇게.

독경 소리가 들려오는 암자 계단 밑 그늘에서 쉴 자리를 찾다가 흠칫 놀랐다. 삽살개 두 마리가 낮잠을 자고 있다. 독경 소리에 내 발소리를 못 들었나보다. 하기는 간간히 지나가는 바람과 염불 소리는 낮잠에는 그만인 친구이겠지.
독경 소리에 계속 내 발소리를 파묻고, 법당 마루로 올라선다. 법당에서는 지혜를 주신다는 문수보살님을 앞에 두고 한 보살님과 스님이 불공을 드리고 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두 손이 모아진다. 이 뜨거운 날,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와서, 저 정도로 기도에 몰입할 수 있는 그 신심이 존경스럽다. 쉬지 않고 절하고 또 절하는 뒷모습에서 정성이 배어 나온다.

법당 마루에서 뒤돌아보니 발밑으로 연꽃 모양의 산줄기가 겹겹으로 포개져 있다. 그 동안 산 넘고 물 건너온 내 인생도 희미하게 포개져 있다. 사느라 피곤한 것일까. 도망쳐 오듯 청주를 떠나온 노독일까. 암자 뜰아래 삽살개처럼 잠이 혼곤히 쏟아져 온 몸이 무너져 내린다.

   
▲ 영천과 문수암 반야사 법당에서 동북쪽으로 200m쯤 올라가면 계류변(溪流邊)에 4면이 준봉(峻峰)으로 둘러 쌓여 녹수청산(綠水靑山)의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곳, 망경대(望景臺) 자리에 문수전(文殊殿)이 있다.
망경대(望景臺) 옛날 문수동자가 용소(龍沼)라고 하는 곳에서 목욕을 하고, 이절벽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고, 아침 해돋이를 배례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설화로 보는 반야사의 역사

  1. 세조가 복천사 법회를 마친 뒤 이 절에 들러 대웅전에 참배 했을 때 문수동자가 나타나세조에게 따라오라고 하면서 절 뒤쪽 계곡인 망경대(望景臺)의 영천(靈泉)으로 인도하여 목욕할 것을 권했다. 동자는 ‘왕이 불심이 갸륵하여 부처님의 자비가 따른다’ 는 말을 남기고 사자를 타고 사라졌는데 목욕을 마친 후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세조는 황홀한 기분으로 절에 들어와서 어필(御筆)을 하사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다.

2. 고려 충숙왕 때에 글재주가 좋기로 소문난 18세의 황도령이 황간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석하게 됐다. 그런데 물‘수’자와 산‘뫼’자를 몰라 낙방하고 말았다. 이에 크게 상심한 황도령은 그 길로 황간 반야사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학식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일우스님께 학문을 배우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우스님이 가만히 보니 황도령 얼굴색이 점점 나빠지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황도령이 한 처녀귀신에게 쓰인 것이었다. 이에 일우스님은 황도령 전신에 금강경 5,149자를 빽빽이 써넣고 옷을 입혔는데 그날 밤 황도령을 찾아온 처녀귀신이 그 금강경의 힘에 눌려 괴로워하다가 황도령의 귀를 물어뜯고 도망쳤다. 그만 일우스님이 금강경을 쓸 때 황도령의 귀부분만 빼먹은 것이다. 그러나 황도령은 금강경 덕분에 살아났고 그 인연으로 출가했는데, 귀가 없다하여 ‘무이법사(無耳法師)’ 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3.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을 당할 때 벽계정심 선사는 머리를 기르고 속인 같이 지내기 위해서 과부를 얻어 사는데 부인은 1년을 살아도 과부요, 2년 3년을 살아도 이름만 영감이지 언제나 남남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스님, 저는 갈랍니다.”
“왜?”
“이름만 영감이지 저는 항상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니 이래서는 더 이상 못 살겠소.”
“그러면 할 수 없지. 그러나 3년 동안 밥해 주느라 수고를 많이 했는데, 그 동안 수고한 수고비로 이것이나 받으시오.”
하면서 은으로 만든 표주박을 내어준다.
부인은 그것을 받아 가지고 나오다가 동구 밖 샘물가에 앉아서 표주박으로 물 한 모금 떠서 마시고 팔자 한탄만 하다가 표주박도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만 놓아둔 채 3년 동안 영감을 얻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나 아무도 살자는 사람이 없었다.그래서 하루는 생각해 보니 어차피 과부 신세 면할 길 없으니 다시 정심선사를 찾아가면 이름이라도 영감이니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그 길로 선사를 찾아뵙고 인사를 올렸더니
“내 다시 올 줄 알았소.” 한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 이유를 알고 싶소. 그러면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찌 했소?” 하고 물으니 부인은 솔직하게 다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자리에 가서 보시오. 아직도 그대로 있을 것이요.”
“어째서요?”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중이 되기를 5백번이나 하였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금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소. 그래서 그인덕으로 무엇이든 내 것이라 이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요.” 그러나 부인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밑져봐야 본전이니 속는 셈 친다고 생각하면서 가서 보았더니 과연 3년 전에 자기가 버린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본 부인은 인과법칙의 이치는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음을 확연히 깨닫고 다시는 다른 마음을 먹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잘 받들어 모셨다고 한다.

4. 반야사 경내 극락전 앞에 있는 배롱나무는 조선 건국 당시 무학대사가 주장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쪼개져서 쌍배롱나무로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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