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김승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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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김승환 공동대표
  • 충북인뉴스
  • 승인 2006.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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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FTA의 22일)

김승환(한미FTA 충북도민운동본부 공동대표)

정치가들은 알았는가. 관리들은 보았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들었는가. 2006년 11월 22일(수) 천둥 같은 함성과 쏟아지는 눈물은 민란(民亂)이었다. 자고로, 민란이 나면 고을 수령이건 나라 임금이건 숙연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건만 오늘의 세태는 그렇지 못하니 비정한 세월만 무상하여라.

그날 나는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면서 걸었다. 살만한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농민/노동자의 서러움을 외면하므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그들과 함께 하려고 눈물을 흘렸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충북체육관에서 도청까지 <한미FTA 저지하자>라는 표어를 안고 대표단 중심에서 행진했다. 눈을 감았지만, 인간이라는 이름의 왼편 동지와 사랑이라는 이름의 오른편 친구가 있어서 넘어지지도 않고 잘못 가지도 않았다.

인간을 유린하고 마침내 인류를 파멸시킬 저 광기(狂氣)의 자본과 신자유주의에 항거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지개를 들고 행진했다. 그리고 수십 년 전에 불렀던 <농민가>를 꺼내서,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를 비감히 불렀다.

보수언론은 22일의 시위를 폭도, 폭동, 폭력 등 온갖 악의적인 용어를 동원하여 비난했다. 무법천지로 묘사하면서도 시위의 원인과 본질에 대해서는 무정(無情)히 외면했다. 그날의 시위를 친북좌파의 반미투쟁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대들은 친미사대주의자요 농민/노동자는 죽어도 자신만 살겠다는 이기주의자로 불러도 괜찮겠는가.

누가 선동한다고 농민들이 그 어색한 시위에 동원될 정도로 어리석은 줄 아시는가. 그 어떠한 말로 선동을 하더라도 농민들은 그렇게 일어서지 않는다. 그야말로 살 수가 없고, 미래도 캄캄하고, 이렇게 스러져가나 저렇게 사그러드나 매 한가지이기 때문에 사판이 이판이 된 것이다. 그날 유혈이나 파괴 등 더 격렬한 사태가 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순정질박한 마음 때문이었다.

더욱 슬픈 일도 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죽지 않으려고 앙바티다가 담장을 밟은 것에 서슬 퍼런 위정자가 있다. 정우택 지사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도청 정문과 담장 훼손에 대한 처벌을 단호하게 하리라고 선언했다. 충북지사는 기강과 위엄을 보여주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인정(人情)을 잃었다. 나는 이 삼엄한 선언이 단지 행정책임자의 직무에서 나온 말일 뿐, 진심은 그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도 마음속으로는 딱하고 어려운 농민을 위로하고 싶을 것이다. 정우택 지사도, 한진희 충북경찰청장도, 우리 모두 농민의 자손이었다. 단호엄벌을 주장하는 박재국의원이나 천명순리를 호소하는 김환동의원 또한 농민의 자식이었다. 무관용(zero tolerance) 선언은 농민/노동자들의 시위를 마약, 매춘과 같은 범죄로 간주했으니 정녕 위정자들이여 하늘의 순리를 아는가 모르는가.

정치가여, 그대들의 부모나 조부모는 분명히 농민이었다. 관리여, 그대들의 부모나 조부모 역시 농민이었다. 더러 농민들의 절규를 외면한 시민들이여, 그대들 또한 농민의 자식임에 분명하다. 한 두 시간 교통이 불편하다고 비난했던 충북의 시민들이여, 여러분들의 마음에서는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동정심조차 사라진 것인가! 자신의 삼촌, 자신의 아버지였을 것이 분명한 농민/노동자가 분김에 무력을 행사한 것만 보이고 그들의 시꺼멓게 탄 심장은 보이지 않는가! 아, 세상인심은 잘 살고 권세 있는 것만 쫓는 것이 이치란 말인가! 허어, 강자만 살고 약자는 죽으라는 이 비정한 세상!

지치고 병든 양은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한국이다. 성장과 발전만이 미덕이고 인정과 사랑은 철없는 감상으로 간주하는 것이 위대한 대한민국이다. 건강한 구십 마리의 양만 살면 그뿐, 천덕꾸러기 농민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내팽개치는 것이 오늘날의 정책이다.

세계화와 세계정부로 가는 FTA가 민족과 문화를 버리고 민중과 인간을 능멸하는데도 그래야 한국이 산다고 주장하는 것이 현 정부와 여당/야당이다. 핸드폰, 자동차, 반도체, 선박을 팔아서 농촌을 살게 해주겠다는 이 가당치 않은 소리가 농민을 모욕하는 비수(匕首)임을 정녕 모르시는가. 농민은 비렁뱅이가 아니다. 농민은 자기 손으로 떳떳하게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싶은 것이지, 시혜적으로 베푸는 알량한 자선에 목을 맬 노예가 아니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농민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려고 무와 배추를 던졌다. 국민으로 인정해 달라고 던진 눈물의 배추였다. 횃불이 아닌 촛불을 들고 간절히 호소라도 해보자고 했던 것이었는데 켜켜이 쌓였던 분김을 억제하지 못한 것이 그만 이른바 ‘폭력’이 되었으니, 더 기막힌 것은 순진한 농민들이다.

배운 것도 많지 않고, 자본도 없고, 그저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갈고 가꾸어야 하는 농민들은 이 나라에서 버림받은 것이 서럽고 또 믿고 기댈 곳도 없기에 마지막 유서(遺書)를 남긴 것이다. 그래서 생긴 사태였다. 그날 그렇게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면서 불렀던 <농민가>였다. ‘밝은 태양 솟아오르는 우리 새 역사’를 위하여 그 어색한 주먹을 들었던 것을 폭도라고 매도하니 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또한 정연한 질서의 무기로 신자유주의와 전쟁을 하려던 것이 그만 엇나가고 말았으니 그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 글은 반성과 회한을 담아 해 본 말일 뿐 22일의 사태가 잘 한 일이라거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님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누구나 FTA에 찬성할 수도 있다. 또 신자유주의 모범생이 될 수도 있다. 그 누가 그 어떤 사상이나 방법을 택해도 존중되어야 한다. 또 국가권력이나 공공질서는 지켜져야 한다. 다만 인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치고 어려운 이들을 외면하지 말자고 호소하는 것이니, 이조차 비난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러매 충북의 시민들이여!,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대표의 한 사람으로, 도민들에게 불편과 불안을 준 것에 대하여 정중한 사과를 드린다. 또한 평화적인 시위가 무력으로 변화된 것에 대하여 변명은 하지 않겠고, 대신 깊은 사죄를 드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소하건대 충북의 시민들께서는, 왜 이런 민란형식의 봉기가 있었는지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실 것을 권한다. 특히 홍재형 의원을 비롯한 정치가와 정우택 지사를 비롯한 관료들께서는 쓰라린 가슴을 안고 논밭을 갈아엎는 농민의 심정을 헤아려 주실 것을 청한다. 내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와야 할 것이다. 희망과 사랑의 꿈은 결코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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