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몽 승전지 충주산성은 ‘월악산 덕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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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 승전지 충주산성은 ‘월악산 덕주산성’
  • 김현길 교수
  • 승인 2024.05.2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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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월악대왕, 덕주산성 등 기록이 반증

고려 때 몽고(몽골)와의 30여년 항쟁 중 충주지역에서의 싸움은 특기할만하다. 충주지역은 내륙 교통의 요충지로 몽고군과의 접촉이 무려 아홉 차례나 있었다. 전국을 유린했지만 그들은 충주 지역민들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번번이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동안 <1253년의 항몽 대승지 ‘충주산성(忠州山城)’은 지금의 어느 성일까?>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된 충주산성인 ‘남산성’을 비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산성은 발굴조사에서 신라시대의 축성이며, 고려시대의 유물이 수습되지 않아 제외됐다.

월악산(月岳山) 덕주산성(德周山城)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었다. 이는 고종 41년 12월의 산천신기(山川神祗)에 대한 제문(祭文)과 고종 43년 4월에 몽고 병이 주성을 도륙하자 관리노약자가 월악신사(月嶽神祠)로 들어간 사실 등에서 추론하는 설이다.

그러던 중 1997년 ‘대림산성(大林山城)’에 대한 지표조사를 하면서 성에서 수습한 고려시대의 상감청자나 어골문 기와 등을 고려해 이곳이 김윤후와 관련한 대몽항쟁의 ‘충주산성’일 가능성이 제기돼 주목됐다. 그러면서 확정된 듯 근년에 산성의 서쪽 입구 도로변에 길게 성벽 모양의 옹벽을 치고 ‘역사에 빛나는 항몽 유적 충주대림산성’이라는 글귀로 홍보하기도 했다.

대림산성은 공간 부족

이에 대한 논거는 대림산(大林山)이 충주의 진산(鎭山), 충주치소에서 4km의 가까운 거리로 주민 입보(立保) 산성으로 지정했을 가능성, 주위가 4km가 넘는 방대한 규모, 구전되어 오는 ‘종주바위’가 즉 1차침입 시 부사(副使)였던 우종주(于宗柱)를 뜻하는 유적으로 본다는 점 등과 덕주산성은 충주에서 50리나 되는 거리로 입보처로 보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이다.

‘대림산성’이 위치한 대림산은 충주의 남쪽의 길목을 담당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라 할 수 있다. 가파른 지형을 활용하여 토석을 혼합해 축성되었고, 동쪽 정상부에는 봉수대(烽燧臺)도 있다.

덕주산성 모습. 대몽항쟁 승전지인 ‘충주산성’이 덕주산성일 것이란 논거가 주목받고 있다.   /제천시청 공식블로그 갈무리

이렇게 1253년 대몽 승전지 ‘충주산성’의 논의 문제가 ‘대림산성’으로 확정되는 듯 20여 년이 흐르다가 제천시 한수면 지역의 월악산에 있는 덕주산성이란 논거가 다시 제기됐다. 충주 향토사연구가 김희찬이 2022년 7월 <충주신문>에 ‘1253년 충주 70일 전투장소 충주산성은?’이란 기고문을 통해서다. 앞서 필자는 2009년 <충주대학교 박물관보>의 ‘충주산성고(忠州山城考)’ 기고에서 의문을 제기한 바 있지만 막연한 추정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의 무관심을 자책하고 몽고 침입시기의 충주지역 항전기(抗戰記)를 다시 개관해 보게 됐다.

대림산성은 김윤후와의 관련기록을 보면 지나친 경사면과 성의 규모 등을 고려할 때 의문이 간다. 우선 소와 말을 달리며 항전할 만한 지형이 되지를 못함은 물론, 70여일을 수많은 주민과 병력이 활동하기에는 공간적 여유가 옹색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몽고 장수 야고가 병을 얻어 돌아갈 때 정기(精騎, 정예기마병) 1000명을 빼 갔다고 하였으니 잔류병력을 추산한다면 적어도 6∼7000명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한다. 지금의 대림산성 주변은 이 같은 병력과 기마(騎馬)들이 머물러 대치할 공간이 사실상 불가능한 지역이다.

이에 대하여 고종 41년(1254) 12월의 고려왕조가 산천신기(山川神祗)에 제사하고 빌 때의 제문(祭文)이 주목된다. <전년(고종 40년)에 크게 군사를 일으켜 …… 이 성[此城(차성)]이 함락되었던 들 …… 다행히도 월악대왕(月嶽大王)께서 큰 위력을 나타내어 도움……>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이 성[此城]’은 전년인 고종 40년(1253) 김윤후의 싸움터인 충주산성을 지칭함이니, 곧 월악산의 덕주산성이라는 사실을 실증하는 자료임이 분명하다. ‘덕주산성’은 월악산 송계계곡 중심부를 남쪽과 북쪽을 차단한 성이다. 성의 중심부인 덕주골에서는 다시 동쪽으로 상덕주사 및 월악신사(산신각?)가 있는 정상부로 오르는 입구부터 3중으로 둘러쌓아 막은 4중성으로 대단한 요새이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충주목 ‘산천’조에 「월악산」, ‘고적’조에 「덕주산성」이 기록되고 있으며, 각기 「충주의 동쪽 45리」에 있다고 하여 충주목 관내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김윤후 중심 관민 승전

《고려사》 권 24에 따르면 고종 43년(1256) 4월 29일(庚寅)에 몽고군이 또다시 충주에 들어와 주성(州城, 읍성인 듯)을 무찌르고 산성을 공격할 때 충주의 관리와 노약자들은 두려워서 감히 항거하지를 못하고 ‘월악신사’로 피난을 갔다. 몽고군이 이들을 추격하여 공격을 가하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번개와 벼락이 함께 들이쳐 왔다. 그러자 몽고군은 이는 필시 神(월악대왕)이 난민을 돕는 것이라 생각하고 공격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庚寅 …… 蒙兵入忠州, 屠州城, 又攻山城, 官吏老弱, 恐不能拒, 登月嶽神祠. 忽雲霧, 風雨雷雹俱作. 蒙兵以爲神助, 不攻而退>

사진1_덕주산성 위치도. 대몽항쟁 승전지인 ‘충주산성’이 덕주산성일 것이란 논거가 주목받고 있다. /제천시청 공식블로그 갈무리
덕주산성 위치도. 대몽항쟁 승전지인 ‘충주산성’이 덕주산성일 것이란 논거가 주목받고 있다.   /네이버지도 갈무리

‘월악산신’이 있는 덕주산성으로 충주의 관민이 유일하게 입보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덕주산성은 수많은 사람들이 웅거하며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있는 요새라고 본다. 충주의 관민은 물론 인근 읍리사람들이 모두 입보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몽고 항쟁에서 월악산(덕주산성)과 충주와의 관련이 깊음을 알게 하는 자료다. ‘월악대왕’의 위력(음덕)을 강조하면서 충주산성 싸움과의 관련을 전하고 있다.

월악대왕은 월악산의 산신임이 분명하다. 월악산은 신라시대에 ‘월형산(月兄山)’이라 하여 신성(神聖)시하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던 곳이며,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왔던 명산이다. 고종 41년 12월의 제문에 ‘전년’의 싸움터인 ‘이 성[此城]’은 곧 고종 40년 김윤후의 싸움터였던 충주산성이며, 지금의 월악산 덕주산성을 이르는 것이 분명하다.

김윤후는 처인성(용인)에서 부곡민(部曲民, 賤民)들과 함께 적의 주장(主將)을 사살하였다. 이때에 김윤후는 천민들의 용맹성을 알았을 것이다. 또한 1차진입 시 충주의 노군잡류별초가 적군을 물리친 사실도 알고, 이를 교훈삼아 관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그들의 신분 해방을 선언하고 싸움에 임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는 피지배에서의 해방은 놀랄만한 항전력을 발휘할 것임을 알고 이를 선용(善用)한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주 만승(萬升) 김현길 국립한국교통대 명예교수는 원로사학자로서 45년 동안 한 길만 걷고 있는 93세의 노익장이다. 김 교수는 중원문화 연구는 물론 충북과 전국의 향토사연구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지난해 말 소장하고 있는 거의 모든 자료를 관리‧활용하겠다고 한 충주문화원에 넘겼다. 이는 스스로 고령이란 점에서 몇 년 전부터 그동안의 저술 등 자료를 정리하고 회억(回憶)하는 실천적 움직임의 하나다. 앞서 2021년 말에는 만승 제4수상집 ‘회억의 장’을, 2022년 6월에는 향토사연구 등을 정리한 중원문화산고(中原文化散稿)를 출간하기도 했다. 지난 4월초에는 80세를 넘기면서 시작한 서예의 개인전 및 김생서집(金生書集) 출간기념회를 여는 등 활동이 왕성하다. 이번 연재는 위 두 저서와 구술을 기초로 본지가 정리해 싣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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