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살아있는 역사 체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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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의 살아있는 역사 체험장
  • 충청리뷰
  • 승인 2003.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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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때면 학생들은  내 고장 유적을 답사하고 체험학습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수행평가 때문에 고민을 한다. 숙제는 해야겠고, 아는 건 별로 없고 결국 학부모가 나서서 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 그리고 어디를 갈까 고민을 하다가 청주의 상징 같은 무심천이나 박물관을 택해 이름의 유래와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그곳에서 본 유물의 이름을 적어 낸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모두 거기서 거기다. 이럴 때 가면 좋은 곳이 있다. 바로 청주의 살아 있는 역사 체험장인  ‘청주읍성’이다.

‘청주읍성’은 청주의 가장 번화가에 있다. 그렇지만 남아있는 건 고작 4개의 문 터 뿐이라 이곳에 읍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몇 년 전 북문에서 남문까지 이어지는 시내 중심길이 일본말인 ‘본정통’에서 ‘성안길’로 바뀌게 되었다. 그때 지명의 유래를 궁금해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성안길’이란 지명이 성의 안쪽 길이란 게 밝혀져 청주에 성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읍성은 언제 지어졌을까. 고려 시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통일신라 신문왕 5년에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고 청주지역을 서쪽에 있는 작은 서울로 높이 불러 서원경이라 하였으며 4년 뒤에 서원소경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대략 1300년 전쯤의 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청주읍성의 모습은 조선 정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지도가 발견되면서 알려졌는데 얼마나 자세하게 그려 놓았는지 지도를 보면 당시의 집이 몇 채였는지 알 정도이다. 직접 발로 뛰며 확인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이런 읍성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기 싶어 성안길에 들어서면 먼저 성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야 한다. 성이 뭔지 모르는 아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애들아, 어느 나라든지 서울에 가면 도성이란 게 있지? 그건 왕궁을 지키기 위해 큰 도시에 쌓는 성이야.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청주에는 예전에 그보다는 작은 읍성이 있었단다. 읍성은 지방 행정의 중심인 고장에 쌓는 성이야. 청주는 지방 행정과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었으니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는 건 당연했겠지?  이제부터 조선시대에 그려진 청주읍성 지도를 보며 그 길을 걸어가 보자. 길이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면서 말야.” 그리고 읍성 기행이 시작된다.

 읍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었다고 하며, 성벽의 둘레는 1640m, 높이는 4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아이들과 북문부터 시작하여 동, 남, 서 4개의 문 터를 길 따라 걸어가다 보면 아이들은 동문터(벽인문)가 있는 청주백화점부터 힘들다고 짜증을 내기도 하고, 음료수를 사 달라고 조르며 다닌다. 긴 거리가 아닌데도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보며 절로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목표를 달성하는 느낌으로 아이들을 격려하며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문 터를 찾아보라고(찾는 사람은 사탕을 준다고 꼬드겨가며 말이다)하면 재미있게 나머지를 돌 수 있다.

동문터를 지나 남문로에 다다르면 그 당시 정문의 역할을 했던 남문 터가 조흥은행과 국민은행 사이에 있다. 눈에 잘 띄지 않으니 잘 찾아야 한다. 그러면 옛날 망루에서 내려다보며 수상한 사람의 출입을 통제했을 그 문 대신 빨간 스프레이로 낙서가 되어 있는 남문(청남문)터를 어렵게 만날 수 있다. 누가 그랬을까 ? 부끄러운 모습이다. 누가 그랬어요? 라는 아이들의 질문이 있을까 두려워 급히 장소를 옮기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는 역사의 현장은 서문터(청추문)이다. ‘이곳은 서문 해장국’ ‘서문 왕족발’ 이라는 간판들이 보이는 서문로에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오던 왜군들에게 저항 한 번 못 하고 빼앗겼던 읍성을 탈환한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에서 육지전으로서는 처음으로 승리하여 우리나라 의병들의 사기를 높이고, 왜군들의 기를 꺾었던 곳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그때 그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작년 월드컵 때의 감격이 이만 했을까? 모두들 하나가 되어 끌어안고 감격했을 모습이 머리 속에 그림처럼 그려진다.

우리로서는 영광의 장소지만 일본으로서는 첫 패배의 장소라 그랬을까.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도시를 정비한다는 이유로 전부 허물어 버려 지금은 돌멩이 하나 찾아 볼 수 없다. 반면 청주에서는 탈환했던 그날인 9월 6일을 기념하여 매년 그 즈음에  ‘청주성탈환제’라는 행사를 하고 있다.  잘 기억하였다가 참여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쯤 되어 아이들과 같이 도로 표지판을 보며 서문로, 북문로, 남문로 하는 따위의 지명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물어 보면 너도나도 소리 높여 아는 척을 해서 교사로서 뿌듯한 기분이 든다. 이 아이들은 이제 어디를 가더라도 지명을 보더라도 예사로 보진 않을 게다.

 이렇게 청주읍성을 돌다보면 2시간이 금방 간다. 적당한 곳을 찾아 준비해온 간식을 먹으며 아이들과 느낌을 이야기하면 아이들은 걸어 다니는 건 힘들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청주가 이런 곳이었나 싶어 새롭게 인식한다. 그리고 직접 걸었던 읍성을 지도로 그려보면 수업은 끝이 난다. 

현재 청주시에서는 비슷한 규모였던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과 비교하여 청주읍성의 일부분을 복원 할 계획이라고 한다. 해미읍성처럼 전체가 다 복원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모습으로 복원이 될지 청주시민으로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자. 그리고 당장 이번 주에 시내를 나가 이 4개의 문 터를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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