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계절에 자치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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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계절에 자치를 생각한다
  • 충북인뉴스
  • 승인 2012.11.0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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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지역, 사라진 정치, 반복되는 선거, 변화없는 삶
생활정치, 직접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한다

옥천 보따리장수 권단의 풀뿌리 이야기

실상 그랬다. 마음을 보듬는 정치란 없었다. 없는 것도 빼앗아 수탈하는 정치는 계속됐다.
정말 그랬다. 삶의 보금자리인 지역이란 없었다. 서울의 하부 말단 조직으로 권력과 금력의 촉수는 마구 뻗치고 뻗쳐 그나마 있던 자양분마저 다 가져가 버렸다. 정치와 지역이 실종된 지역에서 우리는 멍하니 TV와 컴퓨터를 보면서 몸은 지역에 뉘이고 서울 정치를 관전하는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자위해야 했다.

나랏일 걱정이 끊이지 않았지만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기도 했지만, 그 사이 정작 지역의 콩고물과 떡고물은 지역 유지와 토호들이 야금야금 다 받아챙겼다. 유지와 토호들은 다 서울 정치권과 끈이 닿아 있었더랬다. 그 토호들 배불리면서 공천헌금을 주면서 공천권을 따냈더랬다. 하긴 다른 경우도 있었다.

▲ 과천시의회에서 열린 풀뿌리 정치 워크샵에서는 제주에서 과천, 옥천, 청주, 안양 등 각 지역에서 풀뿌리 자치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지역에서 우수 장학생으로 공부깨나 했던 아이들 서울에서 떵떵거리며 살다가 국회의원 해볼랍시고 지역에 하나둘씩 기어들어왔다. 잘 나갈 때는 고향 언저리에도 안 오다가 금뱃지 달아보려는 욕심이 드니까 고향이 보였드랬다. 선거 때 다가오니 발걸음이 부쩍 바빠졌더랬다. 지역 학교에 장학금도 기탁하고 마을회관에 안마기도 사 드리고 상갓집에도 결혼식장에도 출입이 잦아졌더라.

그렇게 아래의 기운 다 빼앗아 올라가거나 위에서 내리 꽂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찌 됐든 지역은 여전히 수탈의 구조에서 벗어날 길 없었고 주민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피폐해져 갔다. 그렇게 군수 되고, 국회의원되서 남의 혈세 생색내며 쓰고 다니기 바쁘다.

사진기사, 운전기사 대동하며 악수하며 낯내고 인사하는 일로 바쁘다. 지역에 살아보니 4년마다 한번씩 뽑는 국회의원선거나 군수, 군의원, 도의원 선거 등을 놓고 보면 당이 필요가 없더라. 보수, 진보라는 이념은 구분하기 조차 어렵고 인물로 뽑는다는데 그 인물 다 어데로 갔는지 참 찍을 사람 없더라.

▲ 함께하는 시민행동 전 오관영 사무처장과 충북녹색당 창준위 최시영 사무국장은 녹색당의 반정당의 정당에 대해 물으면서 정당이 과연 필요한가에 대해 묻고 토론했다.

속칭 진보 운동하는 사람들은 지역에서 잘 보이지도 않더라. 그것도 도시물을 먹어야 하는 것인지. 지역에는 정말 움직거리는 사람이 없더라.

이렇게 신세 한탄을 하는 것은 지역정치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오늘 풀뿌리 이야기는 바로 지역 정치 이야기다.

아무 짝에 쓸모도 없는 그 정당

▲ 지난 2일 과천시의회에서 열린 풀뿌리 정치 프롤로그 워크샵에서 풀뿌리 자치연구소 이호 소장은 녹색당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물으며 풀뿌리 정치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정당은 어디다 쓰는 물건이여. 정을 주는 당인가? 정을 떼먹는 당인가? 정당은 선거 때만 되면 창궐한다. 요즘은 국민경선이다 뭐다 하니 더 바빠졌다. 당원모집에 열을 올리고 국민경선에 참여하라는 전화가 빗발친다. 정당은 정말 선거 때만 아니면 우리같은 시골 지역에서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선거때만 되면 오히려 패거리 짓게 만들고 갈등을 조장하고 싸우게 만드는 가장 나쁜 악 중의 거악인 것이다. 선거 때만 되면 잘 생기지도 않은 인물들 분칠하고 확성기 틀어놓고 왜 이리 난리들인지. 그래도 이것을 들어야 한다면.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봐야 한다면 역겹다.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선거가 과연 민주주의의 꽃인가. 투표가 과연 그런 것인가? 세금 떼먹는 정치인들 양산해내는 것 아니었나. 서울 저 언덕배기에서 볼 때에는 저 아랫녘의 지역에서 어느 당 뱃지 색깔이 걸려있나 관심 많이 가지실 것이다. 지역에 살아보니 어느 당 뱃지 색이라 하더라고 별반 하등 차이가 없더라.

국회의원이 마피아 두목이라면 군수는 그 아들, 군의원들은 그 아들의 동생뻘 쯤 되더라. 그 새로 맺어진 가족체계에서 충성을 맹세하며 지역사회에 수많은 피라미드 가지를 치면서 각종 이권이 될만한 것이 있으면 추잡하게 개입하더라. 청원경찰 등의 일자리는 상일자리 중의 상일자리다.

하찮은 비정규직이라 하더라고 그냥 뽑는 것이 없다. 다 연락하고 자기네 식구들만 건사하는 것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주민들은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더라. 이처럼 지역에 제도 정치는 사망한지 오래됐다.

대의민주주의는 가짜다

우리는 87년 6월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달성시켰을 때 민주주의가 완성된지 알았더랬다. 1인 1표, 나의 표가 대통령을 결정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황홀한 경험이던가? 하지만,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미디어들은 정치를 왜곡 굴절시켰고 절반의 지지도 얻지 못하는 권력들은 점점 커져 무소불위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시민, 인민, 주민이 아니라 그냥 선거 때만 선거구민으로서 민주주의라 이름 붙인 것을 잠깐 맛 보는데 만족해야 했다. 혈세로 모아진 세금의 주인은 따로 있었고 그는 많은 돈을 가진 것 마냥 많은 권력을 가진 것 마냥 군림했다.

공약들은 정말 비어있는 약속이었다. 그 공약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할 만치 밑빠진 독에 물붓기 공약이거나 생색내기 공약이 주를 이루었다. 그 공약 사업들을 다시 복구하느라 또 예산이 낭비됐다. 누가 우리의 권리를 대신한다는 말인가? 위임된 권리는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고 민의라는 이름의 여론은 얼마든지 미디어에 의해 왜곡되기 일쑤였다.

지역 정책의 실종

수많은 정당들도 대통령 후보들도 정말 지역에 대한 제대로 된 정책은 없었다. 어느 지역에 무엇을 유치하겠다. 특화단지를 조성하겠다. 공공기관을 이전하겠다는 달콤한 사탕발림만 있을 뿐이다. 그나마도 광역 거점도시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그 중에 가장 인구가 많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표가 되기 때문이다.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성은 실종됐고 많은 득표만이 살길이었다.

분권과 자치에 대한 철학이 없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고 권한을 나누고 자치력을 높여 권력자가 궁극적으로 필요없는 것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도 잘 선호하지 않았다. 행정구역을 너도나도 통합하여 효율성을 높이자고 했다. 지방자치제가 시작된지 몇 십년이 지났지만 자치구역이란 없고 통치하고 좋은 행정구역만 더 불리고 있는 셈이다.

▲ 토론자들이 고민한 녹색당의 역할과 지역 운동과 생활정치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이 날 토론장에서 나왔다.

▲ 이제 젊은 친구들도 내가 사는 지역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반가운 일이다.

녹색당의 출현, 풀뿌리에 대한 고민 이뤄질까?

대안 정당을 표방하고 나선 녹색당의 출현은 반갑다. 자연의 녹색과 풀뿌리의 녹색이 합쳐진 녹색을 이야기하며 환경과 지역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 2일 과천시의회에서는 녹색당, 우리 이제 지역에서 뭐하지라는 풀뿌리 정치 프롤로그 워크샵이 진행됐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녹색당의 우려와 성찰이 동시에 제기되기도 했다. 그들은 물었다.

“기존의 풀뿌리 지역운동을 하는데 꼭 녹색당을 만들어야 하나?” “반정당의 정당의 기치를 내건 녹색당에게 정당의 의미는 무엇일까?” 함께하는 시민행동 전 오관영 사무처장과 충북 녹생당 창준위 최시영 사무국장을 거의 비슷한 질문을 동시에 던졌다. 현재 정당은 결국 지역에서 패거리를 나누고 갈등을 조장하는 것 아니었던가?

반정당의 정당. 정당의 힘에 대해 정당의 패거리 정치에 대해 그리고 늘 대변만 해왔던 정당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던 게다. 정당의 목적은 권력의 획득이었던가. 그러면 이렇게 모여도 되는 것일까. 뿌리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거대 권력을 얻기 위한 방편에 몸을 실어도 되는 것일까. 움찔하며 멈칫했던 것이다.

우리가 굳이 정당을 만든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왜 모였을까. 지역에서 살아움직이면서 수평적인 연대만으로는 힘이 들었을까. 제도권 정치가 너무 썩어 들어가서 바꿔보겠다는 호기에서였을까. 그러다가 닮지는 않을까. 벌써 닮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고민에 고민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하자. 생활정치의 부활

대의민주주의는 여전히 어두운 장막을 드리우고 있다. 의존하면서 참여를 이야기하는 것은 참 지난한 일이다. 거기에 메여 있으면 메여있을 수록 자양분을 빼앗기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의지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자유롭게 결사하여 스스로의 일을 건사하는 일, 바로 자치이다.

또 서로 협동하여 스스로의 먹을거리를 나눠먹는 일, 그리하여 지속가능하고 행복하게 사는 일 자급이다. 바야흐로 협동조합 기본법이 오는 12월 시행되면서 협동의 물결, 자급의 물결이 일어날 채비를 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먹고 사는 일에 협동, 자급이 되는 것은 자치와 무관하게 진행될 수 없다. 대의민주주의에 기대하며 실망을 하기보다는 스스로의 모임을 만들고 지역의 일을 하나씩하나씩 풀어가는 것 부터 먼저이다. 대의민주주의는 절반도 안 되는 반쪽짜리 허울좋은 민주주의일 수 있다.

행정구역에 얽매이지 말고 우리의 생활권을 돌아보자. 생활권 자치를 고민해보자. 진짜 자치구역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다양한 자치구역이 하나씩 둘씩 만들어지면서 연대할 때 그게 바로 나라가 되는 것이 진짜 나라이다. 억압하는 군림하는 나라가 아닌 그런 나라가 진짜 우리가 바라는 나라가 아닐까?

대통령 후보 단일화 이야기가 한참 떠들썩 하고 누가 좋네 누가 좋네 말들이 참 무성하며 그것 때문에 쌈박질까지 하는 요즈음 정말 대통령을 잘 뽑아야 우리의 삶이 나아질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내 우려가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스스로 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이는 단지 제도 정치, 대의민주주의의 참여가 아니라 생활 정치, 직접 민주주의를 스스로 건사하기 이전에는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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