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청주아리랑, 중국국적으로 유네스코 가나
상태바
연변 청주아리랑, 중국국적으로 유네스코 가나
  • 이재표 기자
  • 승인 2012.12.13 13: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아리랑類 문화유산 등재 계기, 中 ‘맞불’ 놓을 가능성
2005년 단오제 韓 선점 발단, 양국 문화갈등 갈수록 태산

국제사회에서 ‘제2의 애국가’ 구실을 하고 있는 ‘아리랑’이 지구촌 문화유산의 고유명사로 통하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외교통상부는 프랑스 파리에서 5일(현지시각) 개최된 제7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에서 아리랑이 유네스코 무형유산대표목록으로 최종 등재됐다고 밝혔다.

정부는 지난 2009년 ‘정선아리랑’을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 신청했으나 지난 6월 그 범위를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아리랑’ 으로 확대해, 수정된 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우리 정부는 그동안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유산인 아리랑의 유네스코 무형유산 등재를 위해 노력해왔다”며 “이번 아리랑 등재는 국제사회에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문화국가로서의 위상을 드높이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 정암촌은 중국 속의 작은 충북이다. 정암촌에는 청주사람들도 몰랐던 청주아리랑이 있다. 재중동포들은 이같은 전통아리랑을 바탕으로 창작아리랑을 만들어냈고, 중국은 이같은 소수민족문화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고 있다. 사진은 정암촌 정경. 사진제공=정암회.

이에 대해 유네스코 측은 아리랑 등재에 관한 위원회 결정문을 통해 “아리랑이 한민족의 대표적인 민요로서 공동체의 정체성과 단결을 제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한국이 제출한 등재 신청서에도 아리랑 등재가 남북한 간 대화와 교류 증진 등 전 세계 한민족간의 유대 강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언급했다.

문화재청은 우리 민족의 대표적 민요인 아리랑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 등재를 계기로, 각 지역에 산재한 아리랑의 전승 활성화를 위한 체계적인 지원을 위하여 ‘무형문화재 아리랑 전승 활성화 방안’을 시행해 나갈 계획이다. 이로써 현재까지 우리나라가 보유하게 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은 아리랑을 포함해 종묘제례, 판소리, 강강술래, 강릉 단오제 등 총 15개로 늘어났다.

아리랑, 이미 중국 국가급문화재

그러나 우리나라가 아리랑의 문화유산 등재를 서둘러 추진한 배경에는 아리랑을 중국에 빼앗길 수 위기의식이 깔려있다는 분석이다. 중국이 재중동포(조선족)들의 문화를 자국 변두리문화로 국제사회에 각인시키려는 이른바 ‘문화 동북공정’에 속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도 그 대상 가운데 하나다.

눈길을 끄는 것은 연변의 재중동포들이 전통아리랑을 바탕으로 창작아리랑을 선뵈면서 소수민족 고유의 문화예술로 계승·발전시키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연변 양수진 정암촌의 ‘청주아리랑’이 있다는 것이다. 청주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만주를 노린 일본의 전략에 따라 1938년 사실상 강제 이주된 충북도민들이 정암촌에 정착하면서 전승된 것이다.

1993년 임동철 전 충북대 총장에 의해 청주아리랑의 존재가 지역에 알려졌음에도 정작 청주사람들은 잘 모르는 청주아리랑 등 ‘조선족 아리랑’은 2011년 5월, 중국정부에 의해 국가급비물질유산으로 등록됐다. 중국을 구성하는 55개 소수민족의 문화를 보호하겠다는 정책아래 조선족의 문화 역시 중국의 무형문화로 등록한 것이다.

이는 곧 유네스코의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 신청할 수 있는 자격조건을 갖춘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1978년 청주아리랑을 채록한 교포학자 김봉관(도문시 거주)은 재중동포 음악가들이 청주아리랑 등 연변지역 아리랑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에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내 아리랑 연구가들에게 전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중 문화갈등은 중국 동북공정의 연장선상에서 2005년 우리나라가 강릉단오제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한 것이 발단이 됐다. 중국은 당시 단오의 기원이 중국에 있는 만큼 강릉단오제의 문화유산 등재는 부당하다며 강력하게 저지에 나섰다. 중국은 결국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단오절을 ‘용선제(龍船祭)’라는 이름으로 세계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정식 등재시켰다.

또 ‘조선족 농악무’ 역시 자국의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으며 이후 ‘동의보감’ ‘판소리’ ‘가야금’ 등을 둘러싸고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서 한중 문화갈등은 깊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정암촌…그리고 청주아리랑
1938년 청주·옥천·보은 등 180호 농민 만주로 이주
고립·폐쇄된 ‘또 하나의 충북’ 속에서 민요가락 계승

▲ 정암촌의 청주아리랑을 지역에 알린 임동철 전 충북대 총장.
“시어머니 골난 데는 이 잡아 주고/ 시아버지 골난 데는 술 받아드리고…” 청주아리랑의 한 대목이다. 청주아리랑의 화자(話者)는 청주 며느리다. 그러나 누군가의 며느리는 또 다른 사람의 시어머니일 수도 있을 터. 그렇다면 청주아리랑의 화자는 ‘자신의 며느리가 골났을 때 어떻게 대처했을까?’ 청주아리랑은 노래한다. “며늘아기 골난 데는 홍두깨 찜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정암촌의 청주아리랑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청주역에서 만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던 슬픈 이주민들의 노래다. 청주와 옥천, 보은, 충주, 괴산에서 만주로 떠난 180여호 농민들은 사흘만에 함경북도 온성에 내렸고 도보로 두만강을 건넜다. 이 가운데 80여호의 이민들이 양수진 정암촌에 정착했다. 청주아리랑은 내용상 여성의 노래이고, 가락을 보면 척박한 땅을 개척하며 불렀던 노동요다.

1993년 청주사람도 몰랐던 청주아리랑의 존재를 충북에 알린 임동철 전 충북대 총장은 “여러 차례 정암촌을 방문·답사하면서 청주아리랑을 알게 됐다. 그러나 문헌상에 있는 것만으로는 그 실체를 믿기 어려웠다. 1990년대 말 녹음으로 채록된 청주아리랑을 듣고 그 가치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청주아리랑의 녹음 채록은 교포학자 김봉관이 1978년 20kg이나 되는 구형녹음기를 들고 정암촌을 방문해 명창 수준의 가창력을 지녔던 신철(1992년 작고) 등을 만나면서 이뤄졌다.

임 전 총장은 “청주아리랑의 곡조가 정선아리랑과 닮았다는데 음악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노래라고 한다. 더구나 청주아리랑과 정선아리랑 중 어느 것이 먼저이고, 영향을 미쳤는지는 검증되지 않았다. 정선아리랑이 채보되고 정립된 것이 오히려 그 이후일 수도 있다. 청주아리랑은 중국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의 민속조사가 중단됐다가 그 직후 채보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임 전 총장은 또 “청주아리랑은 가사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슬프고 고된 시집살이를 낙천적, 풍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고난의 삶을 이겨나가는 여인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여느 아리랑보다 우수하다”고 덧붙였다.

임 전 총장은 또 “채보 직후 청주지역 노인들에게 보여주니 그 가사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더라. 충북에서 건너간 노래가 분명하다. 청주는 농촌·사회 환경이 변했지만 정암촌은 고립·폐쇄된 정착촌이었다는 점에서 선조들이 지녔던 민요가 변질될 요소가 적었다”고 분석했다.

임 전 총장은 ‘정암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학술조사와 경제지원, 의료봉사 등을 추진해 왔으며 지난 2월 퇴임 이후 영동대 석좌교수로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