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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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
  • 충북인뉴스
  • 승인 2012.12.28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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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달의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정치적 평등에 관하여>·<미국 헌법과 민주주의>

소종민/ 공부모임 책과글 대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 극대화되면, 우리는 그 길을 포기하고 익숙한 길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익숙한 길’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일까. 두려움과 절박함 속에서 한 발 내딛었다가 낭떠러지로 추락한 앞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참극을 목격하면서 다른 지점을 내딛고 나아간 뒷사람은 먹을 것이 있고 쉴 곳이 있는 땅에 간신히 도착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온 여정을 ‘길’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마침내 도착한 새 터전에 자신들의 짐을 풀며 앞사람이 내딛었던 지점은 길이 아니었다고 말할 것이다. 인류 초기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혼돈이 그러하듯 오늘의 사람들에게도 불확실성의 세계가 산출한 판단 불능의 선택지가 늘 새롭게 목전에 다가선다. 다만 초기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그것보다 더 가혹한 점이 있다면, 예전에 걸었던 ‘길’이 오늘도 똑같이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우리 인류는 전지구적 연결망을 상당히 직접적이고도 신속한 것으로 이룩해 온 만큼 새롭게 다가온 선택지 앞에 절박함이나 두려움 따위를 느끼지 않을 만한 역사적 경험과 지혜 또한 충분히 쌓아두고 있어서 ‘선택’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공동체의 리더를 선출하는 정치적 선택에 있어서도 초기의 인류가 겪었던 곤경을 느끼지 않는다. 어떤 리더를 뽑더라도 자신의 안전과 생계는 스스로 해결할 지혜와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 우리의 주권의식은 정치적 권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경제적 권리에까지 미쳐 있다. 정치적 신념과 역사적 경험에 반하는 리더라 해도 내 자신의 경제적 토대와 삶의 근거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합리적 판단과 그럴 수 없다는 감성적 확신을 우리는 공유한다. 의역하면, ‘그 누구도 나를 희생시킬 수 없다’ 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희생될 수 없다’는 논리다. 우리의 합리적 개인주의는 충분히 완성되었다고 해도 좋겠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과 확신은 가당치 않다. 일상에서 자신이 겪는 실제 체험에 위배된 거짓 확신에 불과하다. 신문과 방송에서 듣고 보는 숱한 ‘희생’ 사례, 이웃의 가계와 나의 처지에서 만나는 ‘희생’ 상황을 외면하는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가혹한 희생을 무시한 정치적 판단과 확신은 위험하다. 경제와 무관한 정치, 사회와 무관한 정치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선후관계를 착각하고 있다. 어려운 경제, 험난한 사회 때문에 정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희생을 은폐하고, 미화하는 정치 때문에 나와 이웃의 희생, 즉 경제난과 사회적 무질서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아가 과장하거나 축소함이 없이 우리 자신의 ‘희생’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무능력이 그릇된 정치의 발생 원인이 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못남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쓴다. 외양을 치장해서 우리 자신의 공허한 합리주의와 개인주의에 안주하고 있다. 이웃의 희생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이웃이 희생될 때 나도 희생된다.

이웃의 희생은 한 집 건너, 강 건너 마을에서, 다른 나라의 일이 아니다. 오로지 우리 자신의 일일 뿐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인간됨을 질타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말일 뿐이다. 사회·민주주의 없이 정치적 민주주의는 성립될 수 없다.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껍데기뿐인 형해화(形骸化)된 민주주의다. 우린 아직 그러한 길을 걸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은 반(反)민주주의·반(半)민주주의의 길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길을 걷는 데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무엇일까. 민주주의를 정치의 문제로만 논할 뿐, 경제 영역은 거대 자본의 독재적 통치에 의존하는, 우리 자신의 모순이 아닐까. “만약 국가 통치에서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면 기업 통치에서도 역시 그 정당성을 인정해야 하며, 기업 통치에서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국가 통치에서도 그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Robert Dahl, 1915~)은 주장한다.

이어서 로버트 달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경제적 자유도 여타 자유들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경제적 자유가 개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재산권도 포함한다고 이해해 왔다. 소유권을 기업에 적용해 보면, 이는 국가가 정해 놓은 한계 내에서 기업을 통치할 권리를 수반한다. 과거 농장과 소기업의 운영을 정당화하던 소유권의 논리는 규모가 큰 법인의 통치에까지 확장되어 비민주적 통치를 정당화하고 합법화했으며, 이는 거의 통제할 수 없는 권위의 지배 아래 일하는 모든 이들의 대부분의 삶에 깊숙이 침범해 들어갔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국가 통치에서는 용납할 수 없다던 통치 체계를 기업 통치에서는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미국 헌법은 민주적인가?” 묻는 로버트 달처럼 우리 역시 “우리 정치는 헌법에라도 충실하기는 한가?”라고 물어야 한다. 나아가 우리의 삶이 대기업의 위력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그 안에서 우리는 과연 ‘희생’ 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언제나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건 아닌지, 절실한 성찰이 요구되는 때이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루쉰, <고향>)

신간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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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언어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스마트미디어 시대에 인간의 몸과 마음의 조건에 관한 성찰, 인간의 현실을 지배하는 돈과 노동, 그리고 인간의 본성과 존재론적 의미를 담은 놀이와 예술의 미래를 살핀다. 또한 언제 닥칠지 모를 재앙과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노년의 삶, 그리고 불멸의 비밀까지, 한평생을 살면서 꼭 알아야할 키워드만을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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