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헤쳐진 단재 묘소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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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헤쳐진 단재 묘소의 운명은?
  • 홍강희 기자
  • 승인 2004.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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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 “묘 이장 ‘큰 사건’이지만 불가피”
청원군 “유족과 상의하겠다”, 축제 치르느라 뒷전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소가 지난 9월 22일 느닷없이 파헤쳐졌다. 선생의 유족들은 비만 오면 봉분이 내려앉는 묘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청원군과 협의없이 독자적으로 이장하고 말았다.

단재 며느리이며 묘 이장을 주도해온 이덕남 여사는 “청원군에서 묘가 허물어질 때마다 보수를 해왔는데 나는 그렇게 심각한 지 몰랐다. 98년부터 이런 사태가 계속된 것 같다. 그러다 2002년 여름에 텐트를 치고 보수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때부터 이렇게 큰 비만 오면 묘가 허물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다 수맥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전에도 광복회에서 묘소 답사를 하고는 앞산이 막혀 있고 묘 자리가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며 이런 이유로 지난해 2월부터 청원군에 묘소 이장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 단재 집터에 조성된 가묘
이 때부터 단재 선생이 물 위에 둥둥 떠있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다는 그는 “올 2월 추모제 때도 우기 돌아오기 전에 이장해달라고 오효진 청원군수한테 얘기했고, 지난 5월 중국 북경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얘기했는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군에서는 수맥차단공사를 했다고 하는데 올해만 벌써 2번씩이나 묘가 주저앉았다. 나는 청원군이 이장 의지가 없다고 본다. 고인의 수난을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다”고 분개했다. 묘 이장이 대단히 ‘큰 사건’ 이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여사는 자신이 지난 5월 위암진단을 받아 살아 생전에 이장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고 덧붙이며 하루빨리 이장문제를 마무리짓고 싶다고 말했다.

수맥차단공사 했어도 허물어져

   
▲ 단재동상
유족들은 이장 당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와 대전 국립묘지 쪽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의사타진까지 했으나 반대 여론이 심할 것을 감안해 원래 묘소가 있던 곳 주변에 가묘를 한 상태다. 이 곳은 단재 선생의 집터가 있던 자리다. 당초 유족들이 원했던 자리는 인근 낭성면 귀래리 산 46번지였으나 주인없는 땅이어서 군에서 제재를 가했다는 것. 청원군 관계자는 “미등기 토지라서 매입할 수가 없어 다른 데로 가라고 했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등기부등본상 신모씨가 소유주로 돼있던 46번지 임야 37533제곱미터는 묘 이장 사건이 터진 이틀 뒤인 9월 24일 전산이기착오라는 이유로 산 48번지로 바뀌어 유족들은 이에 대해서도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단재 선생의 유족 중 한 사람인 신종수(46)씨는 “단재 선생의 묘소 밑으로 수맥이 흘러 1년에 평균 2번씩 7년 동안 14번 붕괴됐다. 올해도 2번이나 허물어졌다. 군에서는 수맥차단공사를 한다고 지난 5월 덤프트럭으로 10대 분량의 자갈을 파묻었으나 또 다시 장마비에 흘러내렸다”고 말했다. 신씨는 46번지에 있던 임야가 갑자기 48번지로 바뀐 사실을 주목하며 미등기토지도 법원에 공고하고 주인이 안 나타나면 공탁금으로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고 주장했다.

청원군 관계자는 “97년부터 현재까지 5번 정도 묘소 한쪽이 허물어졌다. 그러나 이장할 때 보니까 땅이 매우 건조하고 척박했다”고 말해 반드시 수맥 때문에 허물어진 것은 아님을 시사했다. 그러면서 “단재 묘는 충북도 지정 문화재면서 애국지사묘이기 때문에 유족들 마음대로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문화재보호법상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거쳐야 하는 등의 절차가 있고, 이장하면 묘 성역화작업이 차질을 빚어 유족들에게 기다려줄 것을 재차 이야기했으나 유족들은 무조건 남의 땅에 옮겨달라고 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따라서 앞으로 현재 가묘 쓴 곳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때마침 지난 1~4일까지 청원가을축제를 벌이느라 정신을 못차린 군에서는 단재 묘소 이장문제를 뒷전으로 미뤄놓은 상태다. 그래서 언제까지, 어떤 방법으로 해결하겠다는 일정도 잡힌 게 없어 유족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군에서는 지난해부터 예산 78억원을 들여 묘소 인근 도로포장, 문동학원과 산동학원 등 학생교육기관 재현, 묘소 주변과 주차장 정비, 사당 이전, 우물가 복원을 내용으로한 단재유적지종합발전계획을 추진중에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국비 1억원이 확보된 상태여서 계획대로 하려면 5년 이상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를 포함한 항간의 의견은 묘소 주변을 너무 화려하게 하지 말고 아담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릉처럼 큰 묘 문제있어”

단재 묘소가 자주 허물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도 수맥 때문이라기보다 변종석 군수 시절 봉분을 너무 크게 해서 비만 오면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김정기 서원대 역사학과 교수(단재를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 회장)는 “묘가 왕릉처럼 커서 갈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곤 했다. 단재 선생은 생전에도 화장을 해서 강에 뿌리라고 했다. 묘 주변의 구조물도 엉망인데 이참에 제대로 하자. 단재 선생의 정신을 기릴 수 있으면서 아담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며 “국립묘지로 가는 것은 절대 반대”라고 주장했다.

이 모임의 공동회장인 윤석위 이건종합건설 대표도 “묘를 크게 키워놓고 그 위에 나무를 괴었는데 배수도 안되는데다 두 번에 걸쳐 봉분을 확장, 밀도가 다르다보니 무너진 것이다”고 전제하고 “묘를 아담하고 작게 만들고 성역화작업도 제대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재 선생은 지난 1936년 2월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지인들은 선생을 3일 뒤에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마을 모신 것으로 역사는 전하고 있다. 유족들은 당시 단재 유해가 국내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일본인들이 미행을 하는 등 경비가 삼엄했다고 말했다. 이덕남여사의 말이다. “아버님이 아이들을 가르쳤던 서당 자리에 묘를 썼는데 일본인들이 미행해 집안사람이 옷 속에 유골함을 넣고 가서 암장했다고 한다. 면장이었던 집안사람은 그래서 이 일로 해임까지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묘자리를 따져 볼 겨를이 없었다.” 현재 유족들은 단재 선생의 국적과 호적을 취득하기 위해 행정소송을 벌이고 있다.

한편 단재 묘의 이장에 대해 지역여론은 분분하다. 후손들에 의해 이장된 지 2주일이 넘었음에도 단재가 차지하는 비중과 느닷없는 ‘사건’을 고려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유족들이 청원군과 상의없이 무작정 묘를 이장한 것은 방법상의 문제가 있지만, 차라리 잘됐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차제에 단재 묘소를 정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족들에 대해서는 단재 묘를 문화재로 보지 않은 단순한 행동이라는 비난이 잇따르는 반면, 문제가 발생해도 해결의지를 보이지 않은 청원군의 무소신행정 또한 이런 결과를 자초한 꼴이 됐다는 게 중론이다. 따라서 군에서는 유족과 전문가 등 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하루빨리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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