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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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 김명기
  • 승인 2005.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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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순복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심어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마르코 4: 30~32)

짙은 신록의 음영이 깔리는 6월만 되면 우리는 ‘아아 어찌 우리 잊으랴, 원수의 총칼들이 짓밟아오던 날을’하면서 노래를 불렀었다. 힘 약한 민족의 설움으로 나라를 빼앗겼고, 그나마 광복을 맞은 조국은 두 쪽으로 갈라졌고 씻을 수 없는 상처, 민족끼리 형제끼리 부자끼리 서로 찌르고 쏘는 전쟁이 일어났다. 힘 약한 민족이 겪어야 했던,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짓눌려야 했던 상흔이었다. 민족이 그럴진대 한 가정의 내력, 한 개인의 삶이야 무슨 말을 하겠는가.

   
주순복씨(루시아·68)는 남과 북, 두 이데올로기의 축에서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개인의 삶이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 하나의 희생양이다. 주씨의 고향은 전북 무주 분암면. 그 고장은 해방 되면서부터 빨치산의 출몰이 빈번했던 지역이었다. 그녀의 부친은 충남 군산군청에서 공무원으로 있다가 그 즈음 분암면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 해가 6.25가 터지기 한 해 전이니까 1949년이었지요. 제가 열다섯 살 때였으니까요. 어느 날이었어요. 오빠는 친구와 함께 당시 가정교사셨던 초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과외를 받고 있었고, 저와 어머니, 아버지는 옆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이 환해지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 비명소리가 들려왔어요. 저와 어머니는 너무 무서워 자는 척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내가 한 번 나가 봐야겠다’ 하시며 나가시는 거예요. 어머니께서 말려도 막무가내셨죠. 아버지의 직책이 면장이었으니까요. 그들은 지리산에 본거지를 둔 빨치산이었어요. 아버지는 나가시자마자 그들에게 붙잡히셨어요. 과외를 하고 있던 오빠와 오빠 친구, 그리고 초등학교 선생님까지 집으로 들이닥친 그들에게 잡혔죠. 아버지는 청년시절에 ‘대동단 청년대장’이었어요. 그러니 그들에겐 표적 1호인 셈이었죠. 게다가 면장을 맡고 있으니…… 동네사람들이 줄줄이 분암면 대유리 분교로 잡혀갔어요. 그들은 초등학교 숙직실로 마을 사람들을 끌고가 때리고 찌르고 갖은 고문을 행했죠.”

그녀는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오빠의 증언으로 당시 상황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분암면장인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다.

“밤에 오신 손님들 무얼 몰라 그러는지 모르지만, 여기 끌려오신 이 양반들은 타관에서 온 사람들이라 아무 것도 모르오. 그러니 모질게 패지만 말고 나한테 말해보시오. 내가 다 말해주겠소.”

그러자 빨치산은 그에게 몽둥이를 주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 가운데 ‘반동분자들’을 가려내 그 몽둥이로 머리를 치라고 했다.

“난 그런 짓 못 하오.”

“그래? 그러면 너부터 맞아야겠군.”

그들은 다짜고짜 부친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선혈이 낭자했다. 부친은 뒤통수를 맞고는 짚단 넘어지듯이 모로 쓰러졌다. 이윽고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저 놈 죽이기는 아깝지만, 안 죽이면 우리가 죽는다.”

그들은 쓰러져 있는 부친에게 다가가 가격 당한 뒤통수를 죽창과 칼로 찍었다. 그러기를 수십 차례. 그러고나서도 혹여 살아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가슴을 난자했다.

“오빠는 아버지께서 살해 당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고 하더군요. 그날 그렇게 대유리 분교에서 살해당한 이들이 13명이나 됐어요. 공무원이나 경찰, 그리고 그의 가족들도 있었지만 아무 이유없이 죽어간 양민들도 꽤 됐지요. 그래서 지금도 그 곳에서는 한날 밤에 제사가 겹쳐 있는 집이 꽤 많습니다.”

경찰이 출동했고 사방에서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빨치산은 퇴각했다. 이튿날 그녀의 큰 아버지가 부친의 시신을 수습해왔다. 부친은 속내의 바람이었고 뒤통수가 깨져 아예 없어진 상태였다. 목부터 가슴까지 얼마나 칼과 죽창으로 찔러댔는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고 살점이 너덜너덜 짓물러져 있었다.

어머니는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청상이 됐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4남매를 키우기 위해 이것저것 험한 일을 해야 했다. 면장 사모님에서 하루아침에 청상과부로 전락하는 비운이었지만, 살아 남은 사람은 다시 살아가야만 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그 악몽이 너무 끔찍해 어머니는 땅굴을 팠어요. 그리고 그 곳에서 6.25를 지냈죠. 산 입에 풀칠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어머니는 우리 가족을 데리고 땅굴을 파놓고 우리를 대피시킨 뒤 보따리 장수를 시작하셨죠.”

실, 세숫비누, 고무줄 등속을 팔아 어머니는 쌀과 보리쌀 등 곡물로 바꿨다. 그것으로 전쟁 통에 간신히 연명해갔다. 그러나 그들이 숨어 있는 산으로 인민군들의 습격이 이어졌다. 빗발치는 총소리, 비명 소리, 쓰러지는 사람들……

이들 가족은 그 곳에서 서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흩어진 가족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생사도 알지 못했다. 남동생은 총에 맞아 죽었다는 풍문이 있었고 오빠는 도망치다 낭떠러지에서 추락했는데 그 이후 생사불명이다. 어머니는 어찌 됐는지 소식조차 모른다. 주씨는 열여섯에 고아나 다름없이 됐다.

“먹고 살기 위해 남의집살이를 했어요. 애기 봐주고 밥 해주고 빨래 해주고. 어떤 아줌마가 성실하게 일하는 제 모습이 보기 좋았나 봐요.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더군요. 먹여주고 돈까지 주겠다면서요. 주인아주머니는 가서 잘 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따라나섰어요. 식당이었어요. 그 곳에서 심부름도 해주고 설거지도 했죠. 그 곳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 한 번은 주인아주머니가 그러시더군요. ‘너 시집가거라.’ 전 결혼에 대해 한 번도 생각을 해보지 않았어요. 아주머니가 덧붙여 말하길, ‘이렇게 살 수만은 없지 않겠느냐? 가정을 꾸리고 네 행복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좋은 혼처가 있는데 어떠냐?’ 가족들과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던 옛일이 떠올랐어요. 풍비박산난 가족들…… 그래 이제 나도 한 가정을 꾸려 오순도순 행복한 삶을 살아봐야 되지 않겠는가 싶은 욕심도 생겼구요. 그래서 결혼을 결심했어요.”

그녀가 결혼을 한 것은 스무살 때였다. 그러나 식당 주인아주머니의 말과 시댁의 형편은 전혀 달랐다. 세 끼 걱은 서로 열심히 일하면 해결할수 있다지만, 우선 남편이라는 사람이 폐병 환자였다. 남편은 농사를 짓고 있던 사람이었다. 속았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시어머니 되는 분이 주씨에게 너무 잘해주었다. 아, 이것도 내 팔자소관이려니, 그녀는 그렇게 치부하고 그 곳에서 살았다. 남편은 잔병치레가 많았다. 늘 앓아눕기가 태반이더니 급기야 결혼한 지 5년을 넘기지 못하고 폐병이 악화돼 세상을 떴다. 시어머니가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며늘아기한테 늘 죄스런 마음이었는데, 이젠 니 살길 찾아 떠나거라. 내 걱정은 말고.”

그러나 그녀는 정(情) 때문에 그 곳에서 2년을 더 살았다. 시어머니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 욕심 차리자고 구만리같은 니 앞길 망칠 순 없다. 좋은 남자 찾아 떠나거라.”

그녀는 스물일곱에 그 집에서 나와 서울로 올라왔다. 식당에 들어가 식모살이를 했다.

“한 번은 호되게 앓았어요. 소변은 마려운데 오줌은 안 나오고 속이 모조리 빠져나올 것만 같고, 배가 너무 아팠어요. 밑을 보니 피고름이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밤새도록 오그린 채로 잤어요. 통증 때문에 제대로 잘 수가 없더군요. 날 새면 나아지려니 했는데 통증이 더욱 심한 거예요. 일어날 수조차 없었어요. 병원으로 갔는데 의사 선생님 말씀이 자궁염증이라더군요. 입원하라고 했지만 안 한다고 했어요. 돈이 별로 없었거든요. 한 달 뒤 맹장염까지 걸려 결국 입원하게 됐죠. 장을 다 들어내고 모조리 소독한 다음 넣는 수술이었어요.”

몸이 아프면 집 생각이 간절해 지는 법. 그러나 그녀에게는 돌아가 쉴 집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수양엄마 딸이 주씨에게 말했다.

“언니, 이제 궁상 그만 좀 떨고 재혼해!”

“누굴 믿고 재혼을 하니?”

“나만 믿어. 언니가 너무 불쌍해서 그래. 몸이 그렇게 아파도 챙겨줄 사람 아무도 없고. 마땅한 데가 있으니까 나만 믿고 재혼 해.”

몸과 마음이 쇠약해 있던 터에, 혼자 궁상 떨며 산다는 것도 지각없는 짓이라 생각된 주씨는 수양엄마 딸의 말을 믿고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은 여자가 죽고 아들 딸 두 명이 있는 가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남자에게는 줄줄이 7남매가 있었다. 큰 월급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모두 거짓말이었다. 또 속은 것이었다. 남자는 직업조차 없었다.

“안 살려고 했어요. 그런데 교회 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내 목숨 하나가 중요한가, 일곱 목숨이 더 중요한가. 그래서 살았어요. 이것도 지지리도 복이 없는 내 운명이려니 하고 말이죠. 그 곳에서 10년간 살면서 아들 다섯에 딸 둘을 키워냈어요. 요리강습도 다니고, 가전제품도 팔러 다니고, 일수놀이 계주도 하면서 일곱을 공부시켰어요. 남편은 늘 놀기만 하는 ‘먹고대학생’이었죠.”

그 곳 생활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계주가 되면서 돈도 많이 떼이고 가전제품 반품도 많이 들어와 손실을 보기도 했다. 남편까지 여덟식구를 여자 혼자서 건사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혈압이었던 그녀는 그 때문에 고혈압이 됐다. 내 자식처럼 키웠지만 그들에게는 그녀가 친엄마가 아니었다. 남편의 폭행도 잦아졌다. 이런저런 일들이 겹치면서 일을 나갔던 주씨가 하루는 영등포 대합실에서 쓰러졌다. 경찰이 물었다.

“아주머니 집이 어디요?”

“없어요.”

“가족은 어딨소?”

“없어요. 순경 아저씨, 그런데 저 배가 고파요. 밥 좀 주세요.”

연고자가 없다는 이유로 그녀는 영등포 시립병원으로 후송됐다. 연고자가 없다고, 가족이 없고 집이 없다고 이야기한 까닭을 주씨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제가 쓰러졌는데 그 집에서 저를 받아주겠어요. 그렇잖아도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다 키워놓았더니 지들 힘으로 큰 줄 아는 사람들이. 차라리 이 참에 그쪽 가족하고 인연을 끊자는 생각도 들었고, 내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그쪽 가족들에게 걸림돌이 되지는 말자고 생각했었죠.”

주씨가 쓰러진 건 고혈압 때문이었다. 고혈압 때문에 그녀는 왼쪽팔과 왼쪽다리가 마비됐다. 시립병원의 의사는 너무 친절한 사람이었다.

“우리 아주머니 밥 안 먹어서 어떻게 해!”

“밥이 싫어요.”

“그래도 살기 위해선 먹어야죠. 주사도 잘 맞고.”

의사는 치료도 열심히 해주었다. 그 곳에서 몇 개월간 입원한 뒤에 다른 곳으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간호사가 말했다.

“아주머니 이제 다른 곳으로 가야 돼요.”

“어디로 가는데요?”

“영등포 부녀보건소요.”

주씨는 그말을 듣고 통곡을 하며 울었다. 친절하기 그지없는 의사로부터 떨어지게 된다는 것도 그렇지만, 부녀보건소는 여자봉사자들이 환자들을 거칠게 다루고 심지어 구타까지 한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족이나 연고자가 나서지 않는 경우에 그쪽으로 가게 되는데 모두들 그 곳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었다.

“안 간다고 버티기도 했지요. 그 병원에서 그러더군요. 이제 더 이상 해줄 게 없다고. 결국 하는 수 없이 갔어요. 소문대로 여자봉사자들에게 맞았어요. 심지어 물도 못 먹게 하더군요. 물을 많이 먹으면 자주 화장실을 가게 되니까 그게 봉사자들에겐 귀찮다는 이유에서였죠.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나중엔 다시 청량리 정신병원까지 가게 됐지요. 장기간 보호자가 나서지 않으면 보건소에서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게 하나의 관례처럼 돼 있더군요.”

장기간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 몇 군데를 오락가락하는게 상례였던 모양이었다. 서로 맡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무작정 내쫓을 수도 없고, 해서 서로 조금씩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그렇게들 하는가 보았다. 청량리 병원에는 여러 종류의 여자들이 있었다. 술 취한 밤거리의 여자들도 있었고, 개중엔 진짜 정신병자도 있었다. 그중 한 여자가 주씨를 아는 체 했다. 물론 주씨는 그녀를 처음 봤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주씨가 퇴원을 할 때 아는 체하던 여자도 함께 퇴원을 했다. 그녀는 주씨에게 말했다.

“언니, 우리 집으로 가요.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아요. 언니하고 같이 지낼 만한 방은 있어요.”

주씨는 거절했다. 그리고 안성으로 갔다. 안성으로 가는 주씨를 그녀가 따라왔다. 안성에는 주씨가 병원으로 오기 전 결혼했던 남편이 있었다. 아는 동생을 찾아갔다. 그녀는 주씨에게 말했다.

“언니, 어쩐 일이여? 근데 어째? 그 형부 재혼했어.”

주씨는 다음 날 재혼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주씨에게 말했다.

“이젠 날 찾지 마.”

그 말과 함께 그는 돈봉투를 건넸다. 3만원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당시엔 일어서지도 잘 못 하는 상태였다. 3만원을 들고 터미널로 갔다. 주씨를 따라온 여자는 주씨에게 그렇게 떠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녀는 안성에 직장을 잡고 주씨를 여관에 데려다놓고는 밥도 먹여주고 뒤치다꺼리를 해주었다.

“이상해요. 정말 병원에서 처음 만난 아가씬데, 나를 왜 그렇게 잘해주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천사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예요.”

안성에는 용하다는 침장이가 있었다. 침장이는 대뜸 주씨를 보고는, “나한테 침을 맞으면 화장실에 지팡이 짚고 다닐 정도는 될 수 있다”고 했다. 주씨는 남편에게 받은 돈 3만원으로 침을 맞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가씨에게 말했다.

“나 그 집으로 데려다줘.”

“구박이 심할 텐데.”

“그래도 괜찮아.”

남편과 새로 들어온 여자는 내키지 않았지만 주씨를 자기들 집에 머물게 했다. 주씨는 그 곳에서 한 달간 침을 맞았다. 그 침술사는 주씨에게 무료와 다름없이 침술을 제공해주었다. 몸도 조금 부드러워지는 듯싶었다. 그러나 이 눈치 저 눈치가 여간 아니었다. 그 곳에서의 생활은 바늘방석이었다. 그런 주씨에게 이웃집 아주머니가 찾아와 말했다.

“꽃동네로 가세요. 아줌마는 천주님 은총을 받아서 금세 걸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걸을 수 있다고요? 걸을 수만 있다면…… 꽃동네, 꽃동네…… 제가 그 곳에 가면 걸을 수 있을까요?”

주씨는 그렇게 해서 1990년 6월 꽃동네로 들어왔다.

“오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았어요. 최귀동 할아버지 동상을 지나서 꽃동네사무실 쪽으로 오는데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청천벽력이 내리치고 억수같이 장대비가 쏟아지는 거예요. 저는 걸을 수도 없고, 앉은뱅이 자세로 엉금엉금 기다시피 사무실쪽으로 올라가고 있었죠. 사무실 쪽으로 올라가던 구급차가 저를 보더니 태우더군요. 그리고 애덕의집으로 오게 됐어요. 애덕의집에선 제 젖은 옷을 말리고 목욕을 시켜주더군요. 그리고 그곳 분들이 제 말을 듣고는 ‘아주머니는 하느님께서 인도하셔서 이 곳으로 오게 된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갑자기 칠흑같이 어두워진 땅에 한 줄기 빛이 꽃동네 쪽으로 비추던 경험,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전 지금도 믿고 있어요.”

주씨는 꽃동네 들어와서 특별히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이제 걸을 수 있다. 뻗정다리지만 1㎞ 정도는 거뜬히 걷는다.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한 번은 복숭아뼈가 두동강이 나는 사고를 당했는데, 통증조차 없었다. 다리가 마비됐었기 때문이었다. 그 통증이 없었던 일조차 주님의 은총이라 그녀는 여기고 있다.

   
주씨는 애덕의집 2층 총책임자다. 배식을 담당하고 가족들 목욕도 시킨다. 그녀는 애덕의집에 있는 아기도 세 명이나 키웠다. 천사의집에 있는 명진이는 벙어리다. 가끔 그 곳으로 가서 명진이를 보면 아들처럼 느껴진다. 예성이와 은옥이도 키웠다. 은옥이는 지금 특수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잔디밭에 풀 뽑는 일도 그녀 몫이다. 4층서 현관까지 청소도 ‘노 터캄. 가족 공동기도 땐 선창을 맡는다. 그녀는 6년째 레지오 단장을 맡고 있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고,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고 싶어요. 꽃동네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저에게는 큰 기쁨이요, 행복이죠. 다만 더욱 소중한 삶을 살다가 맑은 영혼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임하는 것, 그것 하나가 가장 큰 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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