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글>청주, 두 천년 역사속의 문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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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청주, 두 천년 역사속의 문화 <3>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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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호

'선비의 고장' 이라 하는 까닭
조선조가 가장 큰 통치이념으로 삼은 학문은 성리학(性理學)이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그 바탕을 마련한 성리학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이들은 유학(儒學)그룹인 이른바 사림(士林)이다. 그들 사림의 기반은 지역의 붙박이 성씨(姓氏)나 이름이 난 가문에 두었다. 그런 사림의 기반을 고려하면, 청주는 대단한 고장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 龍齋叢話』에는 청주의 명문거족을 다섯이나 들추고 있다. 성종 한 임금 때 사헌부나 사간원 같은 대간(臺諫)의 벼슬자리를 낸 가문만도 다섯에 이른다.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왕실과 혼인을 맺은 재상(宰相)집안으로도 유명했지만, 모두 6명의 대간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 벼슬만이 아니고, 성리학 중심의 학문을 가지고도 조선시대 한 시기를 휩쓸었다. 청주의 학맥(學脈)은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리더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한다. 청주목사라는 벼슬로 청주와 인연을 맺기도 한 이이는 인정과 의리, 협동정신과 자치(自治) 등을 강조한 서원향악(西原鄕樂)을 이 고장에 남겨 오랜 유훈(遺訓)이 되었다. 그 기호학파의 구심점이 호서로 옮겨지면서, 문인(門人)들은 거의 청주목과 공주목에서만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렇듯 학문이 깊으면, 인품을 갖추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에서 일의 마땅한 도리를 아는 엘리트들인 것이다. 그들을 가리켜 선비라고도 말한다. 더구나 선비들은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마음씨의 하나가 의리(義理)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가 어지러울 때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청주성을 도로 빼앗은 중봉(重峯)조헌(趙憲)도 기호학파 문인의 선비였다.

   
유학이념을 뚜렷이 드러낸 기호학파의 문인들이 유별나게 많이 나온 청주를 가리켜 '선비의 고장'이라 한 까닭도 거기 있다. 청주지역의 학풍은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 이어졌을 학원경과 그 배움의 집으로부터 일어났다. 개경(開京)에 세웠던 십이도(十二徒) 같은 고려시대의 교육기관이 청주에 있었는 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사학(私學)의 숨결은 조선시대까지 면면했다. 바로 서원(書院)이다. 청주에는 선조 때로 뿌리가 올라가는 청주 용정동(龍亭洞)의 신항서원(莘巷書院)을 비롯 봉계(鳳溪)․송계(松溪)서원 등이 있다.

'교육도시'라는 대명사
그런 전통은 한말 자주적 민족운동이 일면서 근대 교육체제로 탈바꿈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청주지역에서는 1904년 교육구국의 뜻을 가진 김태희(金泰熙) 등 기독교계 인사들이 나서 광남학교(廣南學校)를 세웠다. 뒷날 청남학교(淸南學校)로 이름을 바꾸고, 한때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민족사학의 뿌리만큼은 지켰다. 그 무렵 설립한 이웃 산동학원(山東學院)은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으로 민족사관(民族史觀) 굳건히 세운 사학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직접 참여했다.

신채호는 산동학원에 앞서 독립운동가 신규식(申奎植)과 함께 향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일이 있다. 당시 사학의 뼈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민족이 다 고단하고 암담한 시대에 한줄기 빛을 던지고자 했던 그들 우국지사의 건학정신은 1919년 3․1운동에 즈음한 청주지역 만세운동의 밀알이 되었다. 그리고 멀게는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 12월 21일 청주 학생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1945년 광복 이후 한강 이남의 첫 대학은 청주에서 태어났다. 천도교(天道敎)청년단체가 나서 1922년에 세운 대성학원(大成學院)이 경영난에 빠지자, 학원을 흔쾌히 인수했던 교육사업가 김원근(金元根)형제가 설립한 청주대학(淸州大學)이 그 첫 대학교육기관이다. 지금은 국립 충북대학(忠北大學)과 서원대학(西原大學)을 합치면 학문이 무르익고, 덩치도 큰 종합대학이 셋이나 된다.

그리고 청주교육대학(淸州敎育大學) 등 다른 대학도 여럿이 있다. 중·고등학교는 자그마치 50여개교에 이른다. 청주시의 전체인구 60만명 가운데 20%인 12만명이 학생인구이고 보면, 청주는 '교육도시' 라는 대명사가 늘 따라붙는 영예로운 도시다. 그것은 영원한 '선비의 고장' 을 의미하는 문화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겨운 이름 '서문다리'
청주는 누가 뭐래도 호서의 한가운데다. 호서를 한데 묶어 충청도(忠淸道)라는 땅이름을 지을 때도 청주에 무게를 실어 주었다. 그러니까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첫 글자를 따서 충청도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선비들 힘이 미치는 사림의 세력판도(勢力版圖)와도 무관치 않았다. 그 충청도는 좌·우도로 나뉘었다가 1908년 충청좌도는 충청북도가 되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나고 나서 오늘날 도청에 해당하는 관찰부(觀察府)가 충주에서 청주로 나앉았으니, 청주가 충북의 중심에 든 지도 어언 한 세기를 바라보게 되었다. 청주의 역사를 사실대로 따지면, 자그마치 2000년에 이른다. 아득한 태고의 선사는 접어 두고, 마한·백제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도 그렇다. 두 천년 역사와 문화가 어울릴 고도(古都)인 것이다.

오늘의 청주는 꽤나 큰 도시다. 그 이전 청주가 근대도시로 탈바꿈할 무렵의 시가지는 옛날 읍성(邑城)때 티를 크게 벗지 못했다고 한다. 1913년에 만든 1200분지 1 크기의 지적도를 근거로 도시계획 자취를 더듬어 대강 그 같은 결론을 얻었다. 이미 도로가 난 흔적이 보이는 지적도의 옛날 청주읍성은 긴네모꼴이었다.

남북도로와 동서도로를 기준으로 갈라 본 구역은 남북과 동서로 각각 여섯에 이른다. 그러니까 읍성 안의 땅을 36개의 네모꼴로 갈라놓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고대 신라의 왕도 경주가 그랬다. 일정하게 구획한 계획도시 경주를 돌아보면, 서원소경의 마스터 플랜 또한 왕도를 본보기로 세웠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든다. 그래서 서원소경시대의 고대도시가 근대 청주 시가지의 밑그림이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요즘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당시 지적도에 연이어 길게 나타나는 청주읍성 바깥의 둑과 밭두덩을 옛 서원경시대 도시성(都市城)으로 여기는 학자들까지 나왔다. 그렇다면 청주에는 특이한 고대도시의 전통 한자락이 깔려있다. 평지성 동쪽으로 우암산 산성과 상당산성 같은 난공의 요새를 옆구리에 바싹 거느린 고대도시가 서원소경말고는 별로 없기 때문에 그렇다.

1920년대 '청주시가도' 를 보면, 지금과는 아주 딴판이다. 무심천을 걸친 다리라고는 둘이 고작이었다. 그 중에 하나인 청주교(淸州橋)는 흔히 '서문다리' 라고 부른 그 다리다. 경부국도로 가는 유일한 통로 서문다리는 한 때 세월에 밀려 차가 다니지 않게 되자 온통 상인들이 차지해 버렸다. 그런데 요즘 상인들이 나가고, 사람들이 홀가분하게 오가는 아름다운 인도교로 돌아왔다. 나란히 마주했던 충북선 철다리는 저 아래 까치내 쪽으로 내려가 조금은 외롭다. 그래도 서문다리는 청주 사람들에 정겨운 다리로 남아있다.

오늘 그 다리를 건너오면, 벌써 청주의 냄새가 물씬 난다. 몇몇 음식집 부뚜막에서 설설 끓어대는 '올갱이국'  냄새다. '올갱이국' 하면, 외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올갱이' 도 모르는데, 그 국을 어찌 알랴. 다슬기를 이르는 사투리이니, 알 리가 없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에서나 보일 법한 깊은 골 맑은 물에서 자라는 다슬기과의 고동이다.

초벌 끓인 다슬기 속살을 빼어 걸려 붓고, 부추를 넣어 한번 더 곱쳐 끓인다. 청주가 원조다. 요즘은 전국에 퍼진 모양이지만, 제바닥에서 먹어야 제 맛이 난다.

"청주 한번 놀러 와유"
그렇게 청한 손이 들르면, 우선 '올갱이국' 을 대접할 요량을 댄다. 청주의 손맛이기도 한 그 토속음식에는 청주고을의 구수한 인심같은 감칠맛도 배었다. 

   
예언이 들어맞은 열린 도시
예부터 청주지역에 전하는 예언(豫言)같은 전설 몇 가지는 아주 흥미롭다. 청원군 남일면 남계리 '무너미고개'로 언젠가 물이 넘는 날, 청주에 새 세상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전북 무주 골짝에서 흘러 북류하는 금강 지류에 대청댐을 지어 그 물이 송수관을 거쳐서나마 무너미고개를 넘었다. 청원군 비상리(飛上里)와 청주 비하리(飛下里)께로 대강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청주공항이 오창에 들어섰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먼 동구(東歐)에서 뜬 폴란드 대통령 전용기가 청주공항에 선수단을 내려놓고 돌아간 일이 있다. 그런 국제공항이다. 예언이 기묘하게 들어맞은 청주에는 3개의 공업단지가 생기고, 이웃에는 첨단의 과학기술을 주축으로 한 위성공업단지 건설이 한창이다. 충북선 철길이 일찍 쌍철로 바뀌었다. 고속도로도 두 노선이나 지나간다. 또 번개마냥 빠르다는 경부고속전철이 잠시 멈추었다 달릴 참이라고 한다. 더는 내륙 깊숙이 홀로 외로운 도시가 아니다.

모든 교통로는 문물(文物)의 길이다. 고대 실크로드는 비단 따위만 들어가는 상업전용 교통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보았다. 반드시 문화가 묻어 다니고, 문명이 들어간다. 그러고 보면, 청주도 이제 사해형제(四海兄弟) 세계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열린 도시다. 더구나 문명진화(文明進化)의 싹을 금속활자문화로 티운 청주는 세계인들과 더불어 오늘의 디지털 문화를 이끌 잠재력을 갖추었다.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 는 바로 그런 소프트 웨어의 지식수준을 실제 확인한 국제문화행사로 평가할 수 있다. 그 옛날 용두사에 철당간을 무쇠로 지은 청주지역 금속공예전통은 '2001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같은 현대적 문화예술행사로 다시 창조된 것이 아닐까. '국제 항공 엑스포'까지 치루었으니, 청주는 현대 산업사회의 에너지와 전통문화가 슬기롭게 조화를 이룬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도시다.

청주, 그 에필로그
청주는 일찍 시립국악단과 시립교향악단·시립무용단을 두었다. 그들 단체의 기량을 담아낼 청주 예술의 전당같은 거대한 종합문화공간도 서둘러 지었다. 삶이 곧 문화라는 문화도시의 여건을 하나하나 갖추어 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시민들이 어느정도 문화향수권(文化享受權)을 누릴 수 있는 도시가 되었다. 그런 문화도시의 기반을 2001년  '도시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문화' 를 주제로 한 국제회의를 청주로 이끌었다. 거기서 '도시와 문화에 관한 청주선언' 을 채택했다. 그 선언으로해서 세계는 청주를 문화도시로 기억하고 있다.

청주를 문화도시로 자랑하는 또 다른 여건의 하나는 고유한 정체성(正體性)을 지닌 도시라는 점이다. 국립청주박물관 '청주고인쇄박물관' 백제유물전시관 등의 전시문화공간은 정체성이 두드러진 도시의 얼굴이다. 그것은 역사에 나타난 문화의 특성을 도시가 얼마만큼 끌어안았는가를 가름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청주의 전통을 인류학이나 민속학 입장에서 보면, 추석권(秋夕圈)문화에 든다고 한다. 그와 더불어 정월 대보름도 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두 세시풍속에는 풍요한 마음과 함께 달처럼 둥근 원융(圓融)의 문화가 함축되었다. 청주는 그저 평범한 도시에 문화 하나를 달랑 얹어놓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2000년 역사와 전통을 깔고 다시 일어나는 세계 속의 문화도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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