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먼 길, 자신에게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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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먼 길, 자신에게 가는 길
  • 충북인뉴스
  • 승인 2006.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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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유적지를 찾아서
빗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간밤엔 영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더니 어느새 잠이 들었나 봅니다. 길 떠나기 전, 비가 올 거라는 예보를 들었지만 이렇게 깊은 밤에 기습적으로 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진 찍을 걱정에 잠이 싹 달아납니다.
여기는 충청도 동북쪽 막다른 곳, 단양군 의풍리입니다. 남쪽으로는 경상도 영주, 북쪽으로는 강원도 영월과 맞대고 있는 도계마을입니다. 오늘 여행의 목적은 순전히 혼자서 바깥잠을 자보겠다는 데에 있습니다. 목적이 그러하니 외로움을 작정한 발걸음인 셈입니다.

외진 장소에서 혼자 오도카니 앉아 있으니 바람이 가는 길이 선명하게 들려옵니다. 바람 소리도 빗소리도 퍽 급하게 지나가는 게 느껴집니다. 창문을 엽니다. 뿌옇게 날이 밝아옵니다. 마을 앞산 높다란 능선 위로 머리를 풀어 헤친 구름이 빠르게 달려갑니다. 성미 급한 바람이 구름에게 갈 길을 재촉하나 봅니다. 마을 앞 남대천도 빠르게 흘러갑니다. 그들이 가는 곳은 동북쪽 산 너머. 속칭 김삿갓 유적지, 김삿갓 계곡 쪽입니다. 오늘 내가 갈 곳도 거기입니다.

   
▲ 김삿갓 주거지
김삿갓 유적지, 김삿갓 계곡, 오늘 내가 갈 곳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아침밥을 먹고 가라며 소매 끝을 붙잡는 보살님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하룻밤을 재워준 절집을 나섭니다. 생전 처음 와 본 동네에서,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지’하고 크게 심호흡하며 잠자리를 청했던 간밤의 호기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절집 마당을 뒤로 하니 버스정류장과 성황당 당집이 한 느티나무 아래 나란히 서있습니다. 거기서 나는 두 가지 뜻을 읽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성황당의 수난 시대는 버스가 마을 구석구석으로 들어오는 것과 때를 같이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무사한 성황당을 보니 그만큼 이 땅이 구석진 마을이라는 걸 말해줍니다. 또 이제 세상이 바뀌어 전통 신앙이 마구 수모를 당하는 시대는 아니니, 옛날처럼 좋은 대접은 받지 못할지언정 최소한 무시는 당하지 않겠다는 안도감도 생깁니다.

   
▲ 김삿갓 문학관
절집 보살님에게 다 못한 인사를 성황당에게 대신하고 고개 너머 강원도 영월 땅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단양 쪽에서 들어오는 길도 비포장 도로였는데 영월 쪽 길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고개에서 내려서자마자, 충청도 땅을 벗어나자마자, 길이 편해집니다. 이제부터는 강원도 영월 와석마을입니다. 눈도 화려해집니다. 김삿갓 문학관, 김삿갓 식당 등 전형적인 관광 마을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발은 충청도 땅에 있습니다. 개울 건너 강원도 땅으로 갑니다. 김삿갓 문학관으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다리를 건너며 시 한 구절을 읊조립니다.

머리터럭 자라면서/ 명운 점차 기구해짐이여./가문은 결딴나고/뽕밭은 푸른 바다가 되었네.

살면서 결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딴 난 자리에는 절망이 자리합니다. 그러나 절망도 영원히 한 자리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바람처럼 지나갑니다. 그게 바로 인생길입니다. 김삿갓 문학관에는 바람처럼 한 생을 살아간 한 시인의 인생이 열두 폭 병풍의 각기 다른 그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봄비답지 않게 거세게 내리는 비는 이내 바짓가랑이를 적십니다. 비는 길 떠난 나그네의 마음을 더욱 가라앉게 합니다. 각박한 세상 인심을 서글프게 노래하는 시구에서 삿갓 쓴 나그네와 동병상련을 나누려는데,

“참, 무책임한 사람이네!”

등 뒤에서 한 아낙이 한 말씀 던집니다.

   
▲ 성황당과 버스정류장이 나란히 있는 의풍 마을 김삿갓
절망도 영원히 한 자리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바람처럼 지나갑니다.

김삿갓을 만나러 가는 길은 경계와 경계를 넘나든 길입니다. 충청도와 강원도를 넘나드는 길이자, 물과 땅을 번갈아 건너다니는 길입니다. 강원도 영월 김삿갓 문학관에서 나와 다시 개울을 건넙니다. 충청도 땅입니다. 길 양편에서 김삿갓 시비(詩碑)가 별별 세상이야기를 다 들려줍니다. 이 비석들 너머, 도랑 하나 건너 강원도 땅에 김삿갓 묘소가 있습니다. 생전의 김삿갓을 모시려 했다가 결국 포기를 했던 아들 익균이 사후에 모셔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산자락은 또 김삿갓이 방랑길로 들어서기 직전에 머물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 유명한 영월 도호부 백일장에서 할아버지를 비판하는 글로 장원을 한 뒤,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숨어 들어온 후 살던 집입니다. 산골짝 깊은 곳입니다.
김삿갓 주거지라는 팻말에서 시작한 산길은 도랑을 다섯 개나 만났습니다. 그 도랑 자체가 충청도와 강원도를 가르는 경계선입니다. 또한 소백산과 태백산이 만나는 지점이라서 양백이라 불립니다. 결국 몇 걸음 떼고 보면 충청도요, 또 몇 걸음 가고 보면 강원도인 셈이지요. 경계란 무엇일까요? 이쪽과 저쪽을 갈라놓는 구분점일 뿐일까요? 하나가 끝나면서 또 다른 하나가 다시 시작되는 지점은 아닐까요?

   
▲ 김삿갓시비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
자신에게 가는 길은 그토록 멀고 험합니다.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젊은 김병연이 살던 2칸 집 마루 끝에 앉아 나는 절망의 끝이 어딘가를 생각합니다. 처마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이 마당 바로 앞 도랑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 물은 한강으로 흘러갑니다. 이 마루에서 김병연은 한 번 더 세상 높은 곳으로 올라가 보려고 서울로 갔었다지요. 그러나 그 쪽 경계 안의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밀어냈다지요. 또 바로 그 지점에서 김병연은 갓을 벗고 삿갓을 쓰게 됩니다.

고대광실 유력자 집안으로서의 삶이 끝나는 그 지점이 세상 가장 낮은 길로 가는 시작점이었던 셈입니다. 그 길에서 자신에게 수없이 물었겠지요. ‘너는 왜 길 위에 서 있는가? 네가 택한 방랑의 길, 고독의 길이 맞는 것인가? 틀린 것인가? 가슴에서 활활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은 무엇으로 끌 것이며, 너를 무너지게 하는 것이 과연 세상이냐, 아니면 너 자신이냐?’ 발에 물집이 생기도록 걷고, 눈이 아프도록 흘러가는 물에다 자신을 비추어 보았을 테지요.

   
▲ 강원도와 충청도를 구분하는 물길, 바로 위에 김삿갓 묘가 있다.
   
▲ 김삿갓 묘 강원도 영월 와석마을
자신에게 가는 길은 그토록 멀고 험합니다.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또 얼마나 울퉁불퉁 하던가요? 비 오는 산길을 내려오는데 자꾸만 눈이 흐릿해져 옵니다. 원래의 길보다 훨씬 울퉁불퉁합니다. 김삿갓은 물에 비친 청산이 거꾸로 다가오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비오는 날 급하게 울퉁불퉁 달려가는 물길에는 청산이 비치지 않습니다. 허나 구름이 한가롭게 제 갈 길을 가는 날, 물에 비친 청산도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오겠지요.

네발 달린 소나무 상에 놓인 죽 한 그릇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감도는구나
주인께서는 무안하다는 말 하지 마시오
나는 본래 청산이 물에 비치어 거꾸로 다가노는 것을 좋아하느니.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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