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를수록 단단해지는 게 사람 마음
상태바
누를수록 단단해지는 게 사람 마음
  • 충북인뉴스
  • 승인 2006.05.2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꽃향기 들려오는 제천 배론 성지를 찾아서

“매서운 신유년 천주교 박해 바람의 막다른 곳,
사상의 대립에다 정치적 탄압이 더해진 박해는 매우 가혹했다.”

세상에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고난이 왔을 때, 그 고개를 넘는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다. 진한 초록 물감이 온 산으로 퍼져가고, 아카시아 꽃향기가 바람결에 들려오는 요즘, 산길을 가다보면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는 꽃이 있다. 찔레꽃. 나는 이 하얀 꽃만 보면 슬프다. 온몸에 가시가 돋쳐 있어 만지기만 하면 사정없이 찔러대는 그 모습이 슬프다. 가시란 결국 무엇이던가. 온몸으로 온몸으로 저항을 하는 형상이 아니던가.

   
▲ 충북 제천 배론 성지,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말해주는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2백여 년 전, 1801년(신유년), 새해 벽두부터 조선은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다. ‘때가 되면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며 온건한 입장이던 조정에서 갑자기 천주교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겉으로는 유교의 사상과 풍습을 거부하는 천주교도에 대한 압박이었지만, 속으로는 정치적 동기가 진하게 배어있는 숙청 바람이었다.


그 매서운 신유년 천주교 박해 바람의 막다른 곳이 바로 오늘 내가 가고 있는 제천의 깊숙한 산골짝 배론 마을이다. 배론은 골짜기 모습이 배의 밑바닥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늘같은 군주의 권위를 한 단계 끌어내리고 인간 위에는 오직 하느님이 있다고 생각한 천주교도들은 기꺼이 세상을 등지고 이 산골짝에서 함께 살기로 한다. 그건 신유박해 이전부터였다. 이미 10년 전, 신해박해 때부터 이들은 화전을 일구어 밥을 먹었고, 질그릇을 구워 저자거리에 내다 팔며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을 꿈꾸고 있었다. 순수한 신앙결사대라고나 할까.

   
▲ 박해를 피해온 천주교도들은 배론 산골 마을에서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 내다 팔면서 꿋꿋하게 신념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신해년 박해는 서론에 불과했다. 천주교도들에게 있어 1801년 신유년은 탄압의 발길 아래에서 무참하게 짓밟히는 해로 기록된다. 신해년 때보다 더 혹독한 탄압이었다. 세상이 뒤숭숭하면 애꿎은 사람도 많이 희생된다.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숨어서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아진 때문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신유년 박해 때와 달리 신해년 박해에는 정치적 칼질이 함께 한 탄압이었다. 그 이면에는 조선시대의 뿌리 깊은 당쟁도 깊게 도사리고 있었다.


사상의 대립에다 정치적 탄압이 더해진 박해는 매우 가혹하다. 골 깊은 정적에게 있어 반대파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다. 순조 시절, 정 순 대비의 수렴청정과 벽파의 집권, 벽파의 반대파인 남인 시파가 연루된 신해박해는 그래서 피로 얼룩지고, 많은 이들의 울음소리가 온 장안에 울려 퍼졌다. 그 와중에서 한 때 임금의 총애를 받던 한 젊은이가 이 배론 계곡 산자락으로 숨어든다. 황사영이라는 27살의 젊은이다. 중국 신부 주문모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와 함께 포교에 힘쓰던 황사영은 그 유명한 정약용의 조카사위다.

   
▲ 성지를 일부 종교인들만 찾아가는 성소로만 생각할 건 아닌듯. 꽃피는 봄, 단풍 고운 가을, 철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안겨주는 자연 풍광이 살아 있는 배론 계곡

황사영은 이 배론 계곡 작은 토굴에서 숨어 지낸다. 그리고 흰 명주 천에다 당시의 천주교 탄압상을 깨알 같은 글씨로 적었다. 중국에 전하기 위해서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 결국 이 백서는 조정에 압수되었지만 그 내용은 벽파 정권을 아연 긴장시켰다.
황사영의 백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먼저 내용을 살펴보자. 당시 조선의 교세와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자수, 처형 사실, 그리고 벽파 정권의 실체를 적었는데 그 기본 기조는 이씨 왕조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조선을 청나라에 병합한다거나 서양 선박의 파견 등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또 조선이 나라를 세운 뒤 올해처럼 많은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는 등의 내용도 기록했다.

   
▲ 최양업 신부 묘소, 배론성지 뒷산에 있다.

이러한 탓에 외세의 힘을 빌려 신앙의 자유를 추구하려 한 반민족적이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여기서 한 젊은이의 역사의식을 엿본다. 아마도 27살 열혈 청년은 자기 나라 역사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자기 신앙에 깊이 매몰돼 있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잘 몰랐거나. 그래서 지나친 자기 비하를 담아 외부의 힘에다 호소를 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한 쪽이 그르다 해서 다른 한 쪽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다. 당시 집권 벽파의 과도한 천주교 배척 행위도 가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거듭 말하건대, 천주교에 대한 철저한 탄압은 이념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시파를 몰아내려는 숨은 술책이 상당히 깔려있는 행위였다. 또한 국제 정세에 어두운 위정자들이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도 않은 채, 무조건 살육의 칼을 휘두른 점도 문제였다. 아전인수식 정책이라고나 할까? 이런 답답한 위정자들의 안목이 결국 쇄국정책으로 이어졌고, 훗날 국제적 분쟁의 씨앗으로 불거진다.

   
▲ 황사영이 숨어서 백서를 쓰던 토굴.

이렇듯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는 길목에는 언제나 충돌이 준비되어 있는 것인가. 기존의 가치관과 새로운 가치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은 쉬이 꺼지지 않는다. 배론 계곡의 저항의 역사는 계속 이어진다. 1855년 이 곳에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진다. 1861년 천주교 탄압이 극심했던 시절, 박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신학교이다. 한국의 두 번째 신부 최양업 신부가 교편을 잡았던 곳이기도 하다. 학교 뒷동산에 묘소도 있다.
사는 동안 누구든 어디에선가 새로운 물줄기였던 적이 있다.
   
▲ 한국 최초의 신학교’성요셉 신학교’

배론 계곡 개울가에 하얀 찔레꽃이 앉는다. 역사에서의 물음은 과거사의 ‘앎’이 아니라, 오늘의 ‘삶’이 되어야 한다. 사는 동안 나도 어디에선가 새로운 물줄기였던 적이 있었다. 누를수록 단단해져야 하는 그 때 어느 한 순간이라도 온전히 맞서 본 적이 있었던가. 또한 새로운 물줄기를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었는데 그 땐 또 어떠했는가. 혹시 자연스런 흐름을 거스르는 암초 같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픈 것은 아니었는지.
찔레꽃 향기가 들려온다. 하얀 꽃 이파리가 물에 어린다.

   
▲ ‘그래도 우린 믿는다’며 모인 천주교도들이 숨어 살던 곳 배론 계곡.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