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얕잡아본 '고구려 여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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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얕잡아본 '고구려 여걸들’
  • 충북인뉴스
  • 승인 2006.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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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여성에 대한 저평가는 역사인물도 비슷하다. 몇년 전부터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는 고구려사 재조명 움직임이 나라 안에서 활발하게 일어났지만, 고구려 여성에 대한 재조명은 주목받지 못했다. 일부 여성사학자들이 고구려 여성의 구실과 지위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했지만 학계에선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설로 인정받지 못했다. 여성계에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전승한 유교사관과 조선중기 이후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여성비하의 분위기 탓이라고 풀이한다.

고구려 관련 드라마 방영과 맞물려 오랜만에 ‘여성사적 뿌리 찾기’ 움직임이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다. 문화방송 드라마 <주몽>의 소서노가 대표적이다. 인터넷 게시판엔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세운 소서노에 대한 누리꾼들의 분석이 한창이고, 소서노의 일대기를 다룬 팩션 <대륙을 꿈꾸는 여인>이 <고구려를 세운 여인, 소서노>(이기담 지음, 밝은세상)란 제목을 달고 개정판으로 나와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제9회 세계여성학대회 부대행사로 공개한 충북 음성의 소서노 석상도 새로운 지역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더불어 유화부인, 평강공주 등 ‘현모양처형’으로 평가됐던 인물들이 실은 현대여성 못지 않은 당찬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시각도 나온다.

‘고구려 여성 복권운동’은 전통적 여성상에 대한 반문이기도 하다. 왜 ‘전통적 여성’은 수동적이어야만 하나? 진취적인 기상을 가진 여성 조상은 없었나? 고구려 여성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다. 고구려연구재단 금경숙 연구위원은 “소서노부터 평강공주까지, 극히 부족한 사료에서 나타나는 여성 인물들이 역사의 고비마다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데 이는 현대 여성의 관점에서도 눈여겨 봐야 할 졈이라고 말했다. 소서노·유화·우씨왕후·주통천녀, 정치력 뛰어날 뿐 아니라 진취적… 역사 고비고비 결정적 구실, 유교·성리학 득세로 그늘 속엡

■ 소서노

주몽의 부인. 유교사관의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최초의 왕비가 있었다는 사실만을 단순하게 기록하고 있다. 반면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를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이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이”로 높게 평가했다. 그는 압록강변 졸본부여 연타발왕의 딸이었다. 실제 소서노는 ‘과부’로 알려졌다. 그는 혈혈단신 무일푼의 망명자였던 연하의 주몽을 만나 재혼한 뒤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고구려를 세우는 데 큰 힘을 보탠다. 기원전 18년 주몽의 친아들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자신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 그리고 백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협상으로 무혈 건국한다. 그것이 백제다.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두 나라를 세운 여성이었던 셈이다.

■ 유화부인

주몽의 어머니.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당시 흔하던 중매결혼이 아닌 연애결혼을 해 아버지의 미움을 샀다. 해모수의 아이를 임신한 뒤 아버지인 하백한테 쫓겨난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뒤엔 국모로 숭상받으며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 호국신으로 떠받들어졌다. (강영경, ‘벽화를 통해서 본 고구려 여성의 역할과 지위’) 고구려 여성들은 고대 전투력의 상징인 말을 즐겨 탔다는 풀이가 있는데, 유화도 말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에서는 유화부인이 아들에게 부여를 탈출할 때 쓸 준마를 직접 골라주는 것으로 나온다. 유화가 채찍을 휘두르자 붉은빛 나는 말 한마리가 두 길 되는 난간을 훌쩍 뛰어넘는다. 어머니의 충고로 이 말의 혀에 바늘을 박아 풀을 먹지 못하게 만든 뒤 주몽은 금와왕에게 말을 하사받는다.

■ 우씨왕후와 주통천녀

우씨왕후는 ‘형사취수혼’의 대표적 인물로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부인이다. 그는 자신을 물리친 첫째 시동생 대신 둘째 시동생인 산상왕을 후계자로 만든다. 고국천왕이 죽은 뒤 은밀히 궁궐을 빠져나간 우씨왕후는 둘째 시동생인 연우를 궁궐로 데려가고 다음날 군신들 앞에서 왕이 세상을 떠나고 자신이 또 한번 왕비가 되었음을 알린다. 세월이 흐른 뒤 산상왕은 우씨왕후 몰래 소후를 얻어 자식을 얻으려고 절치부심하다가 주통천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궁궐을 빠져나온 왕을 만난 주통천녀는 왕이 잠자리를 청하자 아이를 낳으면 버리지 않는다는 약조를 받고 이를 허락한다. 두 사람 모두 색깔은 다르지만 여성의 적극성과 정치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정받는다.


“소서노가 터잡은 2020년전 서울 역사 개막”

   
▲ 차배옥덕
차배옥덕 회장(사진)은 5년 전 소서노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소서노 재평가 운동을 벌이고 있는 대표적 여성 향토사학자다. 그는 10여년 전부터 소서노의 존재에 대해 연구를 해오고 있다. 당연히 고구려나 백제 건국에 기여한 소서노의 구실도 일반 학계보다 더 높이 산다. 차배 회장은 “소서노 여왕은 그 자체로 이미 제왕 수업을 한 여성”이라며 “마한 왕에게 땅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무혈건국을 하는 수완과 역량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제9회 세계여성학대회 총괄기획위원을 맡으며 소서노를 전세계 여성학자들에게 알리는 작업을 했다. 한국여성향토문화연구원장을 맡으며 서울 정도 시기를 600여년 전이 아니라 2020여년 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운동도 함께 펼치고 있다. 소서노가 기원전 18년에 도봉산 밑 중랑천변 우이동 일대에 터를 잡은 것부터 서울의 역사를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차 회장은 “당시 모계사회에서 여성은 물리적인 방어력도 뛰어났다”며 “한 많고 수동적인 여성상을 우리의 전통적인 여성상으로 보려는 시각이 많지만 실제 우리나라 고대 여성들은 강인한 힘과 생명력과 포용력을 품고 있었다”고 풀이했다. 활을 다루고 말을 타는 등 무예에도 능할 뿐만 아니라 재물을 모은 창고를 갖는 등 경제력까지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차 회장은 또 소서노와 같은 진취성과 적극성이 고구려 여성들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본다. “중국 현지에 지금도 남아 있는 오녀산성(졸본성)만 보더라도 다섯명의 여성이 적군 500여명을 물리친 뒤 이름붙여져, 고구려 여성들의 기개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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