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이제는 사랑으로 갈무리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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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이제는 사랑으로 갈무리 할 때
  • 충북인뉴스
  • 승인 2006.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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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칠보산(七寶山)에서 보개산 각연사(寶蓋山 覺淵寺)까지
얼마 전, 여럿이서 함께 간 칠보산에 갔을 때, 당신을 다시 이 길에서 만나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살기 어려운 세상인가 봅니다. 오죽하면 그날의 산행 주제가 ‘기 살리기’였겠습니까. 선들선들 불어오는 바람은 분명 가을이지만 산을 오르는 길은 아직도 여름입니다.

   
▲ 각연사 보배산(709m), 칠보산(778m), 덕가산(858m)이 하늘우산(寶蓋)처럼 도량을 에워싸고 있는 각연 사는 신라 법흥왕 때(515년) 유일화상이 창건했고 현재 법주사의 말사로 되어있다. 깨달을 "각" 자에 연못 "연" 자를 쓴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유일이 절을 짓고자 지금의 칠성면 쌍곡리 사동(절골)근처에 자리를 잡고 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까마귀떼(또는 까치)가 날아들어 자꾸 대패밥과 나무 부스러기를 물고 어디론가 날아가더라는 것이다. 기이하게 여겨 까마귀들을 따라가보니 현재의 각연사 자리 연못에 대패밥 등이 떨어져 있어 연못속을 들여다보니 연못 안에 석불이 하나 있고 그로부터 광채가 퍼져나왔다. 이에 유일이 깨달은 바가 있어 연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이 절이 각연사라는 이야기이다. 주지스님 얘기로는 지금의 바로전 자리가 바로 그 연못자리이고 그 돌부처가 바로 비로전 안에 모셔진 부처님이 라고 한다. 각연사 주변은 산세가 수려하여 특히 봄철 야생화와 가을의 황엽, 홍엽이 절경을 연출한 다.
지난 여름에 흐물흐물 지쳤던 몸이 좀 걱정되기는 했지만, 한층 서늘해진 산그늘의 생기를 믿었기에 올랐던 산입니다. 하지만 자연이란 역시 그저 안아줄 것만 같아도 그 품으로 들어가면 어느새 단련시키듯 힘에 부치기 마련인가 봅니다. 몸이 긴장되니 자꾸만 정상이 어디인가 마음이 급해져 갑니다. 당신도 그렇게 말했지요. 여기가 바닥인가 바닥인가 했더니 아직도 더 남았더라고.

하지만 자연은 분명 치유의 공간입니다. 짙은 숲 그늘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에 당신의 뒷모습이 얼마나 환하게 빛나는지요. 게다가, 숲 길가에 또 말갛게 빛나는 그 꽃. 당신, 잠깐 거기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 꽃을 자세히 좀 보십시오. 맞습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좀 모자란 듯해서 더 순정적으로 보였던 배우 강혜정이 머리에 꽂았던 꽃, 구절초입니다. 오늘 우리처럼 가을 길에서 한 시인도 저 꽃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았나 봅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絶交다!// 안도현 ‘무식한 놈’ 전문”

그렇습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가 다른 것처럼 당신과 나도 분명 다릅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많이 다른 게 사람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 살아온 세월의 차이, 걸어온 경험의 차이, 서있는 입장의 차이. 그 차이를 옳고 그른 것으로 재단할 때 갈등은 필연적인 것이 됩니다.

당신과 함께 산에 오르기를 잘했습니다. 나는 이곳 칠보산(七寶山) 높은 곳에서 당신에게 마음을 풀어놓고 싶습니다. 저 아래 각연사(覺淵寺)가 성냥갑처럼 작지만 확연하게 보입니다.

   
저 아래 우리가 걸어온 길이 보이고, 또 앞으로 걸어갈 길도 함께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차이를 말한 것인데, 내가 차별로 받아들인 건지도 모릅니다. 그 부분은 내 책임입니다.

살아오는 동안의 상처를 극복하는 건 스스로의 몫인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당신 역시 반성을 해보길 바랍니다. 우리는 왕왕 차이를 말하면서 차별을 한 적이 많지 않았던가요?

저 아래 ‘깨달을 각(覺)’자를 각연사는 원래 오늘 우리가 출발했던 쌍곡계곡 안쪽 절말에 세우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달랐습니다. 물론 당신은 그 창건설화를 합리성으로 분석할 테지만, 나는 어느새 또 한 발자국 감상으로 성큼 내딛습니다.

어느 부끄러운 영혼이
절간 옆 톱밥더미를 쪼고 있다.
마치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정답다.
왜 하필이면 까마귀냐고
묻지는 않기로 한다.
새도 짐승도 될 수 없어
퍼드득 낮은 날개의 길을 내며
종종걸음 치는 한 生의 지나감이여
톱밥가루는 생목의 슬픔으로 젖어 있고
그것을 울며 가는 나여
짙은 그늘 속
떠나지 않는 너를 들여다보며
나는 이 생의 나와 화해한다.
그리고 산을 내려가면서
불쌍히 여길 무엇이 남아 있는 듯
까욱까욱 울음소리를 한번 내보기도 한다.
-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나희덕-


유서 깊은 절들이 대개 그렇듯이 각연사도 심산유곡에 숨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꼭 조선 왕조 5백년 동안의 숭유억불 정책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마음을 닦는 수행처로 깊은 산중은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 짝짓기 하는 곤충들
가을산은 여름산보다 한층 조용합니다. 짝 찾던 새소리가 잦아들고 있습니다. 대신 벌레 소리는 더 여물어갑니다. 절 마당의 다람쥐도 재빠르게 계절을 갈무리 중입니다.

사람의 갈무리는 어디에서 올까요? 아마도 생각의 변화, 깨달음에서 오는 게 아닐까요? 내가 당신과 함께 이곳으로 오고 싶어 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각연사(覺淵寺)는 괴산군에서 최고(最古)의 사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산 위에서 내려다 본대로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절에 올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새로운 재미를 찾아내곤 합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절집 식구들의 생리대로,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무덤덤한 스님들에게 굳이 절의 내력을 묻지도 않습니다. 대신 혼자 상냥한 미소를 짓고는 찬찬히 거닐며 옛 절의 모습을 더듬더듬 찾아냅니다. 숨은그림찾기처럼.

대웅전의 스님 상(절을 창건한 유일 대사 혹은 달마 대사)의 상냥한 웃음도 가만히 보면 보물이고, 비로전의 비로자나불 부처님의 편안한 모습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당신의 손을 잡고 절 앞개울 건너로 잡아당기는 것은 이 숲길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각연사의 숨어 있는 보물들의 야외 전시장입니다. 그러나 아랫마을 태성리 주민들의 식수원이라서 가만가만 다녀야 합니다. 길목을 철조망으로 막아 놓은 것도 그 이유에서입니다.

보물이 있다는 표지판 하나도 보이질 않습니다. 이 숲길을 가다보면 몸통만 남은 거북비가 있고, 오래된 종 모양의 부도비들, 그리고 키가 꽤 큰 통일대사 탑비와 그의 부도탑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을, 당신과 이 길을 오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지금 물길 가에는 물을 좋아하는 단풍나무 이파리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어둡습니다. 우리에게도 어둡던 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이제는 가을입니다.

   
▲ 비로전과 석조비로자나불 좌상(보물 제433호). 광배의 구름무늬와 불꽃무늬가 살아있는 듯하다. 정남향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비로전. 비로전 안의 석조 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 하대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세련된 기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단정한 아름다움을 지닌 석불이다. 비로전 앞마당에는 키 큰 보리수 한그루가 서 있다.

   
▲ 금방이라도 기어갈 듯,각연사 사적비를 받치고 있었던 것으로추정. 몸통만 남아있으나 조각수법이 매우 뛰어남
저만치 당신이 홀로 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 함께 왔던 ‘기살리기’ 산행 팀원들을 똑같은 당신의 뒷모습이 울퉁불퉁하기 짝이 없는 이 서덜길을 가고 있습니다. 단풍나무 사이로 가을 햇빛이 비쳐 당신의 등이 얼룩덜룩 합니다. 한 때는 그 등을 한껏 두들겨대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 같던 적도 있었는데, 오늘은 그냥 손을 얹어주고 싶습니다.

당신, 이 숲길에서 보물 하나를 찾았나요? 오래 되고 커다란 통일대사탑 비문을 읽고 있는 건가요? 깊은 숲 그늘이 걷혀, 가을 햇살 마냥 쏟아지는 그 곳으로 나도 들어갑니다. 메뚜기 한 쌍, 당신과 함께 비문을 읽고 있고, 당신의 어깨위로 사마귀 한 쌍도 천천히 가을 갈무리를 하고 있네요. 봄여름을 같이 건너왔던 당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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