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의 그림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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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의 그림 이야기 1
  • 이상기 중심고을연구원장, 문학박사
  • 승인 2024.07.0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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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석조전에서 연동 생가까지"

2023년 9월부터 2024년 2월까지 국립 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장욱진 회고전이 열렸다. 전시 제목은 《가장 진지한 고백》이다. 초기 작품부터 말기 작품까지, 유화에서 먹그림까지, 표지화와 도자기까지 무려 250여 점이 전시되었다. 전시는 화가가 고백하는 형식으로 네 개의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첫 번째 고백에서는 장욱진 화풍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이를 저항과 독창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저항은 자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다. “나의 경우도 어김없이 저항의 연속이다. […] 일상(日常) 나는 내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 이 저항이야말로 자기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독창성은 50년대까지 이어지던 평면적 구상성에서 60년대 단순한(simple) 조형성으로 장욱진 화풍을 이룩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1990년 제자 최종태가 그린 장욱진 화백.
1990년 제자 최종태가 그린 장욱진 화백.

두 번째 고백에서는 발상과 표현의 특징을 보여준다. 발상은 그림에 대한 구상이고 생각(精神)이다. 생각은 외부의 대상을 바라보는 자아의 발견이자 사고방식이다. 표현은 그러한 정신의 고백이고 발현이다. 그 정신을 개성적으로 표현할 때 그만의 독창적인 그림이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창성 속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이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소재가 까치, 나무, 해와 달, 아이, 가족이다.

덕수궁에서 열린
장욱진(張旭鎭) 회고전

까치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하나는 소학교 3학년 미술시간에 미술책(도화책)에 있는 까치를 그려낸 적이 있다. 그 때 그는 책에 있는 대로 그리질 않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까치를 그려서 냈다고 한다. 그랬더니 병(丙)이라는 성적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가 주최하는 <전국소학생미전>에 당선되었고, 그 후에는 최고점수 갑상(甲上)을 받았다고 한다.

1961년 그린 까치와 나무.
1961년 그린 까치와 나무.

다른 하나는 양산 통도사에서 만난 경봉(鏡峰)스님과의 선문답이다. 통도사 선방에서 하룻밤 묵던 장욱진을 찾은 스님이 “뭘 하는 사람이냐?”고 물어온다. 장욱진은 “난 까치를 잘 그립니다”하고 대답한다. 그러자 스님은 “쾌(快)하다”라고 하면서 법명을 지어주었다. “장 비공거사 까치 까치, 나도 없고 너도 없을 때 자연(세계)을 보게 되고, 공도 아니고 색도 아닐 때 여래를 보게 된다. (張非空居士 鵲鵲 無我無人觀自在 非空非色見如來)”

세 번째 고백은 진진묘(眞眞妙)다. 진진묘는 아내 이순경(李舜卿)의 법명으로, 1970년에 그려진 아내의 초상 제목이다. 진묘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준말로, 삶의 무상과 연기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장욱진은 진묘 속에서 참 부처의 모습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1970년대 작품에서는 가족과 불교적 세계관이 표현된 그림들을 볼 수 있다. 이때 유화 그림과 함께 먹그림이 나오게 된다.

아내의 초상 진진묘(1970).
아내의 초상 진진묘(1970).

네 번째 고백은 마음으로 그린 그림들을 보여준다. “그림은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부터 툭툭 튀어 나온다.”는 그의 표현을 인용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1980년 수안보 시절부터 1990년 신갈 시절까지 그림으로, 무상과 공(空)의 세계를 보여준다. 사람과 자연 그리고 주제가 연결되면서 무상과 공의 세계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장욱진은 이때 전체 730여 점 작품 중 500점 이상의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그럼 이제 화가 장욱진을 알기 위해 그의 고향을 찾아가 보자.

장욱진이 태어난
연동면 송용리를 찾아

장욱진은 1917년 11월 연기군 동면 송용리(松龍里) 105번지에서 태어났다.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면서 연기군이 세종시가 되었고, 동면이 연동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송용리라는 명칭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송산(松山)과 도룡골에서 한자씩 따 만들어졌다. 장욱진 생가는 송산마을에 있다.

조치원읍에서 연동면, 부강면 현도면으로 이어지는 591번 지방도와 경부선 철도가 바로 생가 앞을 지나간다. 지금은 폐역이 된 경부선 내판역이 200m 거리에 있다. 장욱진 생가는 도로와 철도가 나면서 마당 일부가 편입되었다. 그 때문에 장욱진 생가는 앞이 막힌 꼴이 되었다. 장욱진 생가의 뒤로는 소나무가 자라는 야산이 있어 마을 이름이 송산이다. 송산의 정상부는 넓고 평평해 너(나)븐 마루라는 이름이 붙었다.

세종시 연동면 장욱진 생가.
세종시 연동면 장욱진 생가.

송산은 결성장씨(結城張氏) 씨족 마을이다. 장욱진의 선대 조상(張訓) 때부터 이곳 송곡리(松谷里)에 살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張基鏞) 때에도 마을의 대지주로 살고 있었다. 현재도 연동면 청연로 624-1에 장욱진 생가가 남아 있다. 집은 사랑채, 문간채,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연동면 문화발전소 김미정 연구원의 안내로 생가의 문간채와 안채를 살펴볼 수 있었다.

동향하고 있는 문간채를 들어가면 ㄷ자형의 안채가 남향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회벽과 돌벽으로 이루어진 기와집이지만, 일부 벽이 벽돌로 개량되어 있다. 가운데 대청이 있고, 그 안쪽으로 8분합 창호문 달린 방이 있다. 동쪽으로 4분합 창호문이 보인다. 서쪽은 부엌과 광으로 보인다. 건물의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다. 6언으로 되어 있으며, 행서과 전서로 이루어져 있다. “맑은 바람 밝은 달 양칸에 비추고(淸風明月兩間), 가을 강물 드넓은 하늘 푸르기만 하다(秋水長天一色)” 같은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마당 앞쪽으로 주춧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딘가 정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 옆으로는 우물이 있다. 뚜껑을 열어보니 물이 깨끗하다. 물을 퍼내면 지금도 사용이 가능해 보인다. 안채 뒤쪽으로는 방풍을 위해 조릿대를 심었고, 한쪽으로 커다란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다. 바닥에는 은행이 많이 떨어져 있다. 마당 앞으로는 회양목과 소나무가 보인다. 


 

이상기 :

중심고을연구원장.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다. 독일문학을 전공해 한국외국어대학교 대우교수를 했다. 현재 중심고을연구원장으로 문화재청 지원을 받아 팔봉서원 문화재 활용 사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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