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봉황리 갑신년 수해 사망자 위령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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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 ‘봉황리 갑신년 수해 사망자 위령비’ ​​​​​​​
  • 김천수 기자
  • 승인 2024.07.1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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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 ‘봉황리 갑신년 수해 사망자 위령비’

 

 충주 ‘봉황리 갑신년 수해 사망자 위령비’ 
 

오호! 슬프다.

갑신년 수해참사를 어찌 필설로 표현하리오!

때는 폭악(暴惡)하 일정말기 1944년 음력 5월29일.

이른 아침부터 비가 마치 바가지로 퍼붓듯 쏟아졌다.

냇물이 범람하여 동네어른들이 멍석을 가지고 나와 제방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불가항력을 느꼈던지, 노약자와 어린 식솔을 데리고 모였다.

바로 그 순간 동네 맨 윗집부터 떠내려갔다.

혹자는 지붕 위에서, 혹자는 삼삼오오 노부모와 어린식솔을 데리고

담모퉁이에 옹기종기 모여 발을 동동 구르거나, 혹자는 대추나무에

호박 매달리듯 하여 사람살리라는 절규의 목불인견 그 자체였다.

삽시간에 능암, 내동, 육십여 가구가 유실되고 오십여명이 희생 되었다.

그 다음날은 집과 가재도구를 모두 잃고 시신이라도 거두려고

냇가를 샅샅이 뒤진들 어디선들 찾으리오.

삼일째 되는 날 여주까지 떠내려가다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분들이

십여명 이었으니 인명은 재천인가.

 

‖ 충주시 중앙탑면 봉황리 300-4 번지에 ‘봉황리 갑신년 수해 사망자 위령비(鳳凰里甲申年水害死亡者慰靈碑)‘가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당시 수해참사로 희생된 사람에 대해 기록돼 있다. 성명 확인자는 45명, 미확인자는 20여명이다.

일제 치하 당시 언론에 갑신년 장마 기록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충북 북부와 경기도 남부지역 노인층을 중심으로 ’갑신년 장마‘ 피해가 구전되고 있다. 지금도 집중호우 뉴스가 이어지면 ‘갑신년 장마’와 비교하곤 한다.

몇 해 전 중부내륙철도 112역사 명칭을 두고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과 충북 음성군 감곡면은 크게 대립했다. 이천시 장호원 노탑4리가 유일하게 청미천을 넘어와 감곡면 쪽에 붙어 있으면서 발생한 것이다. 역사 설계에 노탑4리 토지 일부가 포함되면서 ‘감곡역’이냐, ‘장호원역’이냐를 놓고 몇년을 싸웠다.

결국 ‘감곡장호원역’으로 됐지만, 경기도와 충북도의 주민, 도의회까지 대립했었다. 이 노탑4리 토지가 갑신년 대홍수 때에 밀려와 충북 땅에 붙은 것으로 주민들을 말한다.

2009년 5월 30일 건립된 위령비의 비문은 수해 당시를 겪은 당사자인 이 마을 주민 김택수 전 충주시의원이 지었다. 비문의 마지막에는 “구천에서 헤매는 영령들이시여 이 비에 은거(隱居)하시어 길이길이 영면하소서”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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