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의 그림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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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의 그림 이야기 2
  • 이상기 중심고을연구원장, 문학박사
  • 승인 2024.08.2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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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 남아 있는 '장 화백 고향'의 흔적

장욱진이 고향 송용리를 떠난 것은 6살 때인 1922년이다. 공부를 위해 고모가 사는 서울 당주동으로 올라갔다. 7살 때인 1923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때문에 가족이 내수동으로 이사했다. 장욱진은 8살 때인 1924년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서화와 골동품에 취미가 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선지, 보통학교 시절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보통학교 3학년 때 전일본 소학생 미전에서 까치 그림으로 일등상을 받은 후 그림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보통학교 졸업 후 1930년 경성 제2고보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미술교사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가 미술반을 운영하고 있었다. 미술반에 들어간 장욱진은 유영국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사또 선생으로부터 유럽의 모더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공기놀이_1938. 장욱진 그림.

그러나 장욱진이 이들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나 기록은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33년 장욱진은 역사시간에 일본인 교사에게 반항하는 사건으로 퇴학을 당하고 만다.

그는 그림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해 공진형 화실에 다니며 그림 공부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림 공부를 못마땅해 하던 고모는 장욱진을 크게 나무란다. 설상가상으로 성홍열을 앓게 된 장욱진은 요양차 예산 수덕사로 내려가게 된다. 고모의 소개로 수덕사 만공(滿空)선사를 찾아갔고, 6개월 동안 견성암(見性庵)에서 요양하게 되었다. 이때 스님이 되기 위해 만공선사를 찾은 화가 나혜석을 만났다고 한다.

고향 송용리를 떠나
서울 내수동으로

장욱진은 1936년 체육특기생으로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이때 만난 친구가 임완규다. 1938년 졸업반일 때 그는 조선일보 주최 제2회 전조선 학생미술전람회에 <공기놀이>를 출품해 최고상을 받는다. 1939년 4월 양정고보 졸업 후 그는 임완규와 함께 도쿄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1940년에는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소녀>를 출품 입선했다. 이제 그는 조선이 인정해 주는 화가가 되었다.
 

2독_1949. 장욱진 그림.

 

1941년 4월에는 사학자 이병도 박사의 맏딸 이순경과 결혼한다. 1943년 9월 도쿄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했고, 선전에서 <언덕>이 입선되었다. 1944년에는 일제에 의해 징용에 끌려가 평택의 비행장과 회현동의 관동군 해군본부에서 근무했다. 1945년 해방 후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가 진열과 미술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때 최순우, 김원룡과 교류했다. 그러나 1947년 박물관을 나와 덕수상고 미술교사를 한다.

1948년 2월에는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한다. 이때부터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2월에 제1회 신사실파 동인전을 화신백화점에서 연다. 1949년 11월에는 제2회 신사실파 동인전이 동화백화점에서 열렸고, 장욱진은 유화 13점을 출품했다고 한다. 이때 작품으로 현재 <독>을 만날 수 있다. 장독으로 부르는 전통적인 질그릇으로 앞에 까치를, 뒤에 앙상한 나무줄기를 그려 넣었다.
 

나루터_1951. 장욱진 그림.

1950년 6․25사변이 났을 때 장욱진은 내수동에 숨어 살았다. 1951년 1·4후퇴 때 인천으로 가 배편으로 부산으로 피난했다. 용두산 주변에서 살았으며, 여름에 종군화가단에 들어가 8사단에 배속되어 중동부 전선까지 이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초가을 고향 송용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것은 부산 피난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장욱진은 큰아들과 큰딸을 데리고 송용리로 가고, 아내 이순경은 작은 딸과 부산 친정으로 들어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장욱진은 어머니를 모시고, 두 자녀와 함께 빨간 기와집에 살았다. 그리고 아들이 연동초등학교 4학년, 딸이 1학년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장욱진은 이곳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주변 산책과 그림 그리는 일로 소일했다. 송용리에서 함께 살던 큰딸 장경수는 당시 장욱진이 자신과 오빠를 데리고 내판역까지 걸어가곤 했다고 회상한다.

1951년 가을 송용리에
피란 와 그린 그림들

이곳에서 장욱진은 자식들과 1952년 여름까지 1년이 못 되게 살았다. 당시 장욱진은 <연동 풍경> <배주네 집> <나루터> <장날> <자화상> 등 4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연동 풍경>은 연동 송용리를 그린 그림으로 연동초등학교에 기증했다. 배주는 이웃집에 살면서 장욱진의 딸을 잘 돌봐주던 언니였다. <나루터>는 연동에서 조치원으로 건너가는 미호천의 나루를 말하고, 그곳을 운행하던 나룻배를 그린 것이다. 그림을 통해 당시 조치원 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나룻배를 많이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자화상_1951. 장욱진 그림.

<자화상>은 당시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하다. 그것은 화가 자신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보리가 누렇게 익은 들판 사이로 황톳길이 ㄱ자로 이어진다. 원경에는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다. 그 앞을 제비 네 마리가 열을 지어 날아간다. 전면에는 턱시도를 입고 모자와 가방 그리고 우산을 든 신사가 당당하게 걸어간다. 그 뒤로 강아지 한 마리가 졸졸 따라온다. 화가는 이 그림에서 자신의 절대 고독을 표현했다고 말한다.

“많은 그림이 그 역경 속에서 태어났으니 동네 사람들이 기인(奇人)이라 말하도록, 두문불출 그리기만 했던 것이다. 간간이 쉴 때에는 논길, 밭길을 홀로 거닐고 장터에도 가보고 술집에도 들러본다. 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하늘엔 오색구름이 찬양하고 좌우로는 풍성한 황금의 물결이 일고 있다.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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