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의 공간에서 안으로 영글어 가는 길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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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의 공간에서 안으로 영글어 가는 길을 봅니다
  • 충북인뉴스
  • 승인 2006.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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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무심천(無心川)을 따라 가는 길
오늘은 무심천에서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봄부터 허랑허랑 메고 다니던 바랑을 이제 내려놓습니다. 헤어지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가옵니다. 올 한 해도 다 사그라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편지를 무심천에서 쓴다니까 고개를 끄덕일 당신이 눈에 선합니다. 지난 번 고향 뒷동산의 약샘을 찾아가던 길에서는 ‘너는 어쩌면 생겨나와 옛이야기 듣는가--’면서 김소월의 노래를 연방 부르며 다녔는데, 오늘은 김민기의 노래가 따라옵니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 오면,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내면의 아이를 찾고, 맞아들인다는 노랫말일 텐데요. 철이 없기는 없는 모양입니다 나란 물건은. 철 지난 계곡, 내암리(무심천의 발원지 중 한 줄기)부터 올라갑니다. 추억을 찾아 올라갑니다. 이 길은 메마른 요즘 아이들에게 자연 학습을 시작한 첫 교육장입니다. 옛 기억으로 가는 이 길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지나온 길을 자세히 살펴보고 싶어서입니다.

오랜만에 겨울 맛 나는 날이지 않습니까. 눈이 촉촉합니다. 내암리 작은 계곡이 눈구름으로 꽉 차 있습니다. 하얗습니다. 몇 년 새 수량이 적어진 계곡물로 눈가루가 소리 없이 스며듭니다.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이 개울이 어느새 청주 부근의 자연 학습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스며들은 게지요. 자연의 원리에 사람들의 마음이 스며들어간 거지요.

아직 얼지 않은 개울 바닥에서 나뭇잎 한 장을 꺼냅니다. 옆새우가 알뜰하게 갉아먹어서 잎맥만 남아 있습니다. 물 밑바닥과 나뭇가지 저 끝이 하나의 원으로 그려집니다. 이런 생태계의 순환 원리를 처음 알았을 때, 그 희열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지요.

간밤에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환해진 것처럼, 철모르는 청맹과니가 개안을 했다고나 할까요? 어디에고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던 습관대로 ‘생태 명상!’이라는 멋들어진 말도 지어냈습니다. 그런데 당신께 한 가지 물어볼까요? 앎과 깨달음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게 오늘 우리가 풀어내야할 숙제입니다. 숲과 어울리지 않는 사방댐과 쓸데없이 넓어진 길, 그리고 어설픈 인공 조림으로 계곡의 형태가 마구 뒤틀려 버린 내암리가 주는 숙제입니다.

숲과 어울리지 않는 사방댐과 쓸데없이 넓어진 길, 그리고 어설픈 인공 조림으로 계곡의 형태가 마구 뒤틀려 버린 내암리. 이게 오늘 우리가 풀어내야할 숙제입니다. 좁은 골짜기에서는 바람이 조용히 모여 있었나 봅니다. 내암리를 나와 맞은편 물줄기, 곧 또 다른 무심천의 발원지인 한계리에는 제법 매서운 겨울바람이 다니고 있습니다.

꽤 깊숙한 골짜기일 텐데, 입구에서부터 아주머니 한 분이 바람 속을 걷고 있습니다. 40분을 넘게 걸어가셨을 길을 단 4분 만에 모셔다 드리고, 다시 돌아 나옵니다. 한계저수지가 넓게 펼쳐져 보입니다. 갑자기 산다람쥐 같이 누군가 옆을 휙 스쳐 지나갑니다. 산악자전거를 탄 이들이 눈길을 가르며 세찬 눈보라 속으로 향해 갑니다. 겨울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나도 차에서 내립니다. 저수지를 한참 바라보는 것은 마음자리가 뒤숭숭할 때 효과가 있는 명상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한계리 저수지는 한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세월을 낚는 이들마저 거부하는 거센 겨울바람이 온몸을 흔들어댑니다. 들숨에서는 코가 막히고, 날숨에서는 찬서리가 뿜어져 나옵니다. 피부의 숨구멍에도 찬바람이 두들기나 봅니다. 얼얼합니다. 거센 추위는 정신마저 얼얼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 무심천 철새

   
오랜만에 제대로 추운 겨울 속에서 단 몇 분도 있지 못하고 다시 따뜻한 차안으로 들어옵니다. 물줄기를 따라 내려갈 작정입니다. 물에다 자신을 비추고, 물길에다 삶을 비추어보는 것은 비단 오늘의 우리뿐만이 아닐 겁니다. 예술가나 옛 선인들이 자연을 그리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진을 찍는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들이 말하고 싶고 느끼고 깨달은 것, 즉 그들의 심적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말(言語)이며 매개체이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뜻이 그대로 작품에서 비추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 밑바닥에는 그들의 세계와 자신에 대한 관계 또한 있는 그대로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상 그 시대의 정서를 이해하고 싶을 때면 그 시대의 예술을 먼저 탐구해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 청원군 한계리 저수지
이제 물줄기는 신송리 앞에서 장평교로 갑니다. 그 동안 주변 산줄기의 실개천에서 흘러온 새 물들이 계속 합해지며 낮은 데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한계리에서 몰아치던 눈바람도 한결 눅었습니다. 슬몃슬몃 햇빛도 비칩니다. 걸음도 걸을 만합니다. 위쪽 상류에서는 물길과 눈밭, 세상이 딱 그렇게 두 부분으로만 보였는데, 장평교부터는 길 하나가 또 선명히 나있습니다. 요즘 청주 시민들이 애용하는 산책로와 자전거전용 도로가 하얀 눈밭 사이로 기다랗게 이어져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우리 시대의 정신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무심천을 그 대상으로 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들이 그 시대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그들의 표현력을 한층 떨어지게 합니다. 간접 표현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우리는, 시대의 문화와 인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입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무심천은 정확하게 우리 시대의 감수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머리의 가리마처럼 청주 시내를 가르고 있는 무심천 중류. 이곳은 물도 빠르게 흐르고 사람들도 빠르게 지나다닙니다. 있는 그대로 흐르던 상류의 물줄기 제 속도가 아닙니다. 이 곳에서 평화가 깨진 것은 이미 오래 전입니다. 하상차도가 놓여지고, 하상 주차장이 들어섰다가는 없어지고,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가 들어서는가 하면, 생태하천을 위한 큼지막한 돌덩이까지 물 가까이로 전진해 있습니다. 지금도 이곳에는 주황색 건설 장비들이 곳곳에서 바삐 일을 하고 있습니다. 스쳐 가는 내 호흡마저도 가빠집니다.

무심천 하류, 까치내가 저기 보입니다. 비로소 물길도 제 속도로 가고, 내 발걸음도 한층 편해집니다. 아침결의 한계리 찬바람도 잠잠해지고, 눈도 그쳐 있습니다. 널따란 까치내에 겨울 철새들이 무리지어 떠다닙니다. 더러는 웅크리고 있고, 더러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유유히 떠다닙니다. 또 더러는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비상하기도 합니다.

   
▲ 내암리 계곡
자연을 바라보는 일은 확실히 일종의 명상입니다. 특히 새를 보는 일은 ‘지금 여기’에 집중을 잘하게 합니다. 무심천의 새들은 아주 평화롭게 지금 속에 있습니다. 가끔씩 저들끼리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몇 초도 안 돼 금방 끝납니다. 싸우고 난 뒤 그들은 각자 저만큼 반대 방향으로 뚝 떨어져 갑니다.

그런데 그 때 그들은 거의 어김없이 날개를 힘차게 몇 번 퍼덕거립니다. 사람이나 동물로 비유하자면 오줌 눈 후 진저리를 한번 치듯 말입니다. 순전히 짐작이긴 합니다만, 아마 그 몸짓은 자기 몸 안의 부정적인 기운을 떨쳐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돼 그들은 다시 평화롭게 물위를 떠다닙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정신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무심천을 그 대상으로 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인식, ‘입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무심천은 정확하게 우리 시대의 감수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의 움직임보다 더 느리게 발걸음을 가만가만 옮겨 놓습니다. 눈 밟히는 소리가 아삭아삭 사과 속살 부서지는 소리 같습니다. 겨울은 겨울입니다. 강바람이 뼛속 깊이 파고 들어옵니다. 피부로도 추위가 느껴집니다. 내린 눈에 지쳐 쓰러진 물풀 숲을 지나 물 가까이 가장 낮은 데로 나를 내려놓고 싶습니다.

   
여기 무심천을 걸어오는 내내 당신은 내게 말해왔습니다. ‘이제 겨울 속으로 과감하게 들어가라. 가장 피하고 싶은 그 두려움 속으로 뛰어 들어가라. 두려움이 지배하는 게 바로 우리의 인생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안으로 대담히 똑바로 들어가면 우정이나, 내적 단련, 또는 영적 인도라는 따뜻한 보호 장비를 껴입을 수가 있다.’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이젠 동상에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계절의 순환이 주는 가르침을 믿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가장 견디기 힘든 이 겨울 역시 생명을 주는 공간임을 믿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금 여기’라는 것도 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삶이 내게 말을 걸어 올 때마다 함께 했던 당신.

   

생명 가진 모든 것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은 자기 정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기 정화의 길은 좁고 험하다. 완전한 정화에 이르려면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나 절대적으로 정욕을 버려야 한다. 사랑과 미움, 친밀함과 소원(疏遠)함의 대립이 이어지는 세속의 흐름을 초월해야 한다. 나는 내가 끊임없이 쉬지 않고 노력은 하면서도 아직도 내 속에 그 세 겹의 정결이 되어 있지 못함을 안다. 세상의 칭찬이 내게 달갑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슴을 찌르는 때가 많다. 교활한 정욕을 정복하기란 내가 보기에는, 무력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나는 나를 무(無)에까지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피조물 중의 맨 끝에 세우지 않는 한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아힘사는 겸허의 궁극점이다. -간디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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